눈(雪)을 부정한 내 눈(目)
초여름이면 어김없이 철쭉의 장관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곳이 소백산이다. 드넓은 평원에 철쭉의 물결로 장관을 이루던 소백산 정상 비로봉은 11월이 되면 눈꽃을 활짝 피우고 우리를 맞이한다.출발 하루 전날까지 계속되는 비 때문에 산행을 취소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겨울산행은 눈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무채색의 나무와 산, 이들은 평면의 사진을 더욱 평면으로 만들어버려 흔히 말하는 산에서의 장관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1시간 정도 산행을 한 끝에 하산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50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들이 주고받는 말에 귀가 쫑긋해졌다. 그들은 “올해 처음으로 많은 눈을 봤다”, “정말 눈 구경 원 없이 하고 간다”며 즐거이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상이 보이지 않는 우리에게는 꿈같은 소리, 거짓말 같은 소리일 뿐이었다. 왠지 그들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긍정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40분 정도를 더 올라갔을까. 살을 애는 듯한 찬바람과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눈밭. 이것이 정녕 11월에 보는 눈이란 말인가. 불과 30분전까지만 해도 눈(雪)을 부정했던 내 머리와 입은 심판대에 오른 죄인처럼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소백산은 나에게 오르가슴을 느끼게 했다
옷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은 굳어갔지만 눈은 더욱 휘둥그래졌다. 마치 남녀 간의 격정적인 섹스 이후에 느끼는 오르가슴을 나는 눈보라를 통해 맛보았다. 오르가슴이 몸은 힘들어 지치지만 감정과 기분은 최고로 고조되는 절정의 순간이지 않는가.햇빛을 받은 눈보라는 남극의 설원을 연상하게끔 한다. 우리 일행의 모습은 남극오지를 탐험하는 탐험가처럼 발걸음 하나하나가 비장함을 품고 있다.
정상 비로봉 표지석에는 누구의 장난인지 눈사람을 만들어 올려져있다. 눈을 보면 모두가 동심으로 돌아가는가 보다.
배고프다고 재촉하는 일행들 때문에 더 이상 눈 속에서 뛰어 놀지는 못했지만 그 멋진 풍경은 아직도 내 가슴 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비로봉 산장에서 먹는 라면과 도시락
살을 애는 듯한 찬바람을 맞으며 먹는 라면의 맛은 산해진미와 비교할 수 없는 천상의 맛이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정상주’. 허기진 뱃속으로 내려가는 소주 한 잔의 맛은 정말 맛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이 아닐까.
영화 식객(食客)을 보면 군대에서 먹던 라면이 그리워 그 맛을 찾기 위해 설정된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영화에서 보듯 맛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입으로 느끼는 미각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이라는 조미료를 쳐야 최고의 맛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길지 않은 5시간 정도의 산행과 내 눈을 의심케 한 눈(雪)의 절경은 소백산을 추억하는 동안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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