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지속…시장 개입보다 ‘통화정책’ 필요성↑

올 한해 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물가다. 올 초부터 정부가 적극적으로 물가안정 정책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물가를 잡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이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에 정부는 더욱 강력한 물가안정 정책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 부호가 붙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17최근 중동 정세 불안이 가중되면서 우리 경제의 대외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 서민 장바구니 물가 안정에 총력을 기울여주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한 총리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43회 국무회의에서 현재 가동 중인 품목별 가격 수급 동향 일일 점검 체계를 더욱 강화하고 상황 변화에 따라 필요할 경우 경제 부총리를 중심으로 선제적이고 종합적인 대응 방안도 검토해달라고 지시했다.

그는 국제 유가의 변동성은 물가의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각 부처는 민생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데 각별한 각오로 임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가동 중인 품목별 가격 수급 동향 일일 점검 체계를 더욱 강화하고 상황 변화에 따라 필요할 경우 경제 부총리를 중심으로 선제적이고 종합적인 대응 방안도 검토하라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또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7일 시장에 가격 인상 자제를 당부했다. 농산물 수급 불안정과 국제 유가 상승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 10월에도 기대한 만큼 물가가 안정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에 구두 개입방식으로 시장에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유통 전문가들은 물가 안정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친 상황에서 단기적인 미봉책일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어 여전히 정부의 물가정책에는 부정적인 시각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년대비 3.7%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합동브리핑을 하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합동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초부터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물가안정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여전히 물가 상승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OB맥주가 지난 11일 주요 제품 출고가를 평균 6.9% 인상했고, 이보다 앞서 지난달 초 공정위가 주류 도매업계를 상대로 담합 의혹 조사에 착수한 사실이 알려졌다. 유통업계에서는 이 같은 조치가 술값 연쇄 인상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대비 3.7%를 기록하자, 정부는 10월부터 물가가 어느 정도 안정 기조에 오를 것이라고 밝혔다. 추 부총리는 지난 5일 기자간담회에서 “10월과 11월로 가면 (물가가) 3% 초반대로 안정되고, 연말로 가면서 3% 전후로 안정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이 격화돼 안정 조짐을 보였던 국제 유가가 다시 뛰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 안정될 거라 기대했던 농산물 가격도 이상 기온이 기승을 부리면서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고유가 탓에 9월 수입물가지수는 2.9% 증가했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작년쯤부터 금리를 인상하고 전기요금 등도 정상화했어야 대외 요인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물가 정책을 펼 수 있지만 지금은 손발이 다 묶인 상태라며 정부당국이 나서 직접 시장을 단속하는 방식으로 나선 것은 물가 안정이 그만큼 멀어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미친 밥상물가초비상

이런 물가 상승으로 인해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바로 민생이다. 환율과 국제유가 불안정, 원부자재 가격 인상 등으로 밥상 물가가 전방위적으로 오르면서 소비자들의 부담이 연일 가중되고 있다. 이미 지출이 적지 않은 상황임에도 인플레이션이 아직 본격화하지 않았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조금이라도 저렴한 상품·서비스에 수요가 몰리고 있다.

지난 14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달 설탕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41.58로 전년 동기보다 16.9% 상승했다. 이는 2020년을 기준(100)으로 했을 때 물가지수인데 올해 74.0%에서 813.8%로 급등한 데 이어 또 오른 것이다. 작년 9(20.7%) 이후 최고치이기도 하다.

소금 가격 역시 심상치 않다. 지난달 소금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67.17로 전년 동기보다 17.3% 올랐다. 작년 8(20.9%) 이후 13개월 만에 최고치다. 설탕과 소금 모두 재배 면적이 줄어든 데다 엘니뇨 현상 등 이상기후가 더해지면서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조미료 가격만 오른 게 아니다. 이달 1일부터는 원유(原乳) 가격 인상분이 적용되면서 우유와 유제품의 소비자가격도 순차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또 지난 11일부터 오비맥주가 자사 제품 출고가를 조정, 식당가를 중심으로 술값 인상까지 이뤄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곳곳에서 가격 인상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식품·외식업계에서는 이제 겨우 물가인상 초읽기수준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의 반발을 고려한 기업들이 인상 폭을 최소화했으나, ()달러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데다 국내외 인건비와 원부자재값이 모두 올랐기 때문이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맥주를 예로 들면 주요 산지의 맥아 가격이 30~40%가량 올라 출고가 조정이 불가피하다도매상 등 중간 유통을 거친 뒤 맥주(업소용 제품)가 식당가에 납품되면 소비자가격이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가을에 접어들고 나들이, 캠핑 등 야외 활동이 늘어나면서 채소 등 신선 먹거리를 중심으로 가격이 폭등하고 있어 서민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18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에 따르면, 지난 17일 청상추 가격은 100g 소매 기준 1,629원으로, 1개월 전 1,914원과 비교해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값이 비싸다. 1년 전 1,115원 대비 46.09%·평년 1,153원 대비 41.28% 뛰었다.

상추와 더불어 깻잎 가격은 100g2,971원으로, 1년 전 2,502·평년 2,136원 보다 각각 18.74%·39.09% 올랐다.

대파 1kg 가격도 4,001원으로 불과 1개월 새 812원 올랐으며, 1년 전(3,238) 보다 23.56% 비싸졌다. 여기에 풋고추(100g1,692), 오이(10개당 14,530) 가격도 1년 새 28.76%, 30.17% 뛰었다.

100g 기준 국산 삼겹살 가격(축산물품질평가원)2,700·목심은 2,532원으로, 삼겹살과 목살이 100g 기준 깻잎보다도 저렴해지는 가격 역전 현상이 발생, “삼겹살에 깻잎을 싸 먹어야 할 지경이라는 말이 나오며 소비자 부담을 가중하고 있다.

추석이 지났지만, 과일 가격 역시 여전히 비싸다. 사과(홍로) 10개의 평균 소매 가격은 36,139원으로 1년 전보다 34.40% 올랐고, (신고) 10개 소매 가격도 3241원으로 1년 전보다 13.54%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고물가 기조가 계속되면서 농축산물은 물론 공산품까지 오르지 않은 품목을 찾기 어렵다하반기 가격이 안정세를 찾지 못하고 계속 오름세를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 소비자들의 부담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소비심리유통업계 파격할인 경쟁

고물가로 인해 소비심리는 꽁꽁 얼어붙고 있다. 이처럼 고물가 기세가 꺾이지 않으면서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소비 성향을 고려해 유통업계가 파격 할인경쟁에 나섰다.

이마트는 지난 4월 공동 구매 서비스 오더픽을 내놨다. ‘주문(order)’픽업(pick up)’의 합성어인 오더픽은 이마트 앱으로 공동 구매 상품을 주문·결제하고 지정한 매장에서 받는 시스템이다. 이마트가 사전에 제품 물량을 대량으로 확보해 협력업체의 발주량을 보장하면서 가격을 낮춘다. 애초 목표한 공동 구매 주문량을 달성하면 정상가보다 최대 70%까지 할인된 가격에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롯데마트와 롯데슈퍼도 물가 안정을 위한 공동 구매 프로젝트 온리원딜을 운영한다. 우유 김치 화장지 세탁세제 등 고객 선호도가 높은 상품의 매입 물량을 확대해 일반 상품보다 최대 50% 싸게 판다. 지난 61일 첫선을 보였을 당시 온리원딜 상품 평균 판매량은 같은 상품군의 일반 상품보다 8배나 많았다.

홈플러스는 지난해까지 비정기적으로 하던 온라인 사전 예약제를 지난 3월부터 매주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일찍 구매하는 고객에게 가격 할인 또는 연계 상품 증정 혜택을 준다.

편의점 CU도 앱테크(스마트폰 앱을 통해 돈을 버는 재테크 풍조)족을 겨냥한 포인트 충전소를 운영 중이다. 다양한 앱 이벤트에 참여해 획득한 CU 멤버십 포인트를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최근 5년 중 올해 CU 포인트 적립과 사용 건수가 최고치를 찍었기 때문이다. 201913.0%· 9.4%였던 포인트 적립·사용 비율은 올해 들어 9월까지 각각 23.1%·17.8%를 크게 올랐다.

유가·환율 동반 상승 우려..가격 인상 압박

국내 유통업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무력 충돌 장기화에 따른 수입 물품과 수입 물가 전반에 미칠 악영향도 우려하며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업계에 따르면 유통업계 전반으로 국제 정세 불안으로 유가와 환율 동반 상승 등이 우려되고 있다. 원부자재 가격과 물류비 등이 올라 수입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수입 차질도 예상된다. 인근에 주요 항로인 수에즈 운하가 있어 운송에 차질이 생길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유통업계는 주로 수에즈 운하를 통해 스페인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에서 돼지고기와 올리브유, 초콜릿, 과자류 등을 수입하고 있다.

전쟁 장기화로 수에즈 운하 항로에 차질이 빚어지면 이들 수입 물품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국내로 들어와야 한다. 이 경우 운송 기간이 2주가량 더 길어져 물류비가 오르면 판매가격 인상 압박을 줄 수밖에 없다.

업계는 이런 상황을 고려해 전쟁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확산 조짐이 보이면 대응책 마련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대체 수입 지역을 물색하거나 국내산의 운용을 늘리고 환율 영향을 낮추기 위해 결제통화를 바꾸는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물가 내려라팔 비트는 정부실효성 없이 부작용 논란 우려도

한편 라면, 과자, 빵 등 식품업계가 정부 압박에 못 이겨 판매가격을 일제히 인하했다. 인하폭이 크지 않아 생색내기라는 비판이 나온다. 다른 한편에선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며 우려를 나타낸다. 민간·시장 중심 경제를 강조해온 현 정부 기조와도 배치된다. 기업의 팔을 비트는 방법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통화정책이 물가 대응의 핵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내 라면 업계 1위 농심이 지난 627일 가장 먼저 인하 대열에 나섰다. 자사 대표상품인 신라면과 새우깡의 판매가격을 각각 4.5%, 6.9% 낮췄다. 소매점 기준 1000원짜리 신라면 한 봉지는 50, 1500원인 새우깡은 100원 정도 내렸다. 삼양식품은 삼양라면 등 12개 제품 가격을 평균 4.7%, 오뚜기는 면류 15개 제품의 가격을 5%, 팔도도 11개 제품의 가격을 5.1% 각각 인하했다. 롯데웰푸드, 해태제과, SPC 등 제과·제빵업계도 주요 품목들의 판매가격을 5~10%까지 낮췄다.

정부는 라면값을 찍어 누르고 있지만 라면이 전체 소비자물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통계청의 소비자물가지수 가중치(2020년 기준·461개 품목)를 보면 1000을 기준으로 했을 때 라면은 2.7에 그친다. 전세(48.9), 휘발유(20.8), 전기요금(15.5) 등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라면을 포함해 과자와 빵의 원재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밀가루의 소비자물가 가중치는 0.1에 불과하다.

불가피한 시장 개입이라는 측면에도 불구하고, 특정 품목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물가 대응은 실효성 없이 부작용 논란만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은 가격을 억눌러 안정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제때 인상분을 반영하지 못하고 미루면 기업은 기업대로 힘들어지고 훗날 한꺼번에 가격 인상에 나섰을 땐 소비자가 더 큰 부담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모 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경쟁 제한적 상황에서 업계 담합으로 라면 가격이 오른 것인지, 아니면 원재료 가격 상승 등 불가피한 요인으로 가격이 오른 것인지는 구별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정부가 당연히 행정적 조치로 개입하는 것이 맞고 후자라면 정부의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장의 자원배분 기능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물가 안정이 지향점이라 한다면 근본적으로는 금리 인상과 같은 통화정책으로 대응하는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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