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도는 북한 땅이 지척이다. 바다 하나를 두고 황해도 연안군과 맞닿아 있다. 교동도에 실향민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실향민들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고향을 눈앞에 두고 살아간다. 분단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이곳은 시간이 잠시 멈춰있다. 1960-70년대 풍경이 섬 곳곳에 가득하다. 교동대교가 놓이면서 더 가까워진 교동도로 떠난다.

교동도의 첫 관문

시원스레 뚫린 교동대교를 지나 교동도에 들어선다. 도로 옆으로 넓은 평야가 이어진다. 이곳은 국내 최상급 명성을 얻은 쌀 곡창지대이다. 교동도에서 한 해 생산되는 쌀은 이곳 사람들이 10년 동안 먹고도 남을 양이라고 한다. 거대한 호수를 닮은 난정호수와 고구저수지가 교동 평야의 젖줄이다.

교동도는 한때 배를 타야만 오갈 수 있었다. 교동도의 유일한 출입구였던 월선 포구는 그때의 흔적이 여전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선착장 대합실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비록 다른 용도로 바뀌었지만, 간판은 여전하다. 곳곳에 포토존과 옛 사진 갤러리가 있어 과거를 추억하기 좋다. 한적하고 조용한 이곳에서 세월을 낚는 낚시꾼들도 많다. 월선 포구는 강화나들길 9코스 다을새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길을 떠나 교동향교, 화개산, 동진포, 제방길을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코스로 16km, 5~6시간 정도 소요된다.

돌아오지 않는 섬, 교동도의 슬픈 역사

역사 속 교동도는 유배지로 기억된다. 고려의 수도 개경과 조선의 수도 한양과 가깝지만, 배를 타고 오갈 수 있다는 점이 한몫했다. 고려 21대 임금 희종(1181~1237)이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충헌(1149~1219)에 의해 폐위되어 이곳으로 유배됐고, 조선 시대에는 연산군, 광해군, 임해군 등이 귀양살이를 했다. 화개산 정상에서 대룡시장 가는 길목에 연산군 유배지가 있다.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은 경복궁을 나와 평교자를 타고 김포와 강화를 거쳐 교동도로 유배됐다. 연산군 유배지에는 연산군의 복식과 호송함거 등을 고증에 따라 복원해 놓았다. 옛날에는 교동도를 일컬어 돌아오지 않는 섬이라 했다. 한번 유배되면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배 온 왕족들에게 교동도는 굴욕과 죽음의 섬이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 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막막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을 터다. 시간이 흘러 6·25전쟁 이후에는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고향을 지척에 두고 삶의 터전을 일궜다. 이렇듯 교동도는 오랜 시간 향수와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섬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대룡시장

교동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을 꼽으라면 대룡시장이다. 번화하다고는 하지만 시골 읍내보다 더 소박하다. 대룡시장은 6·25전쟁 때 연백군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휴전 이후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을 본 따 만든 시장이다. 이곳에 오면 제비집이 곳곳에 보이고 제비 모형이 많다. 마을주민들이 유독 제비를 아끼는 이유는 고향 연백에서 찾아올지도 모르는 제비에 대한 실향민의 특별한 애정 때문이다.

시장 골목은 400m 남짓 짧디짧다. 잰걸음으로 걸으면 1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골목 구석구석,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며 사진도 찍고 유랑하듯 시간을 보낸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간판, 깨진 유리창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작은 가게들까지, 허름하고 빛바랜 가게가 빈티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게 앞을 지키는 고양이들도 교동도를 닮아 여유롭다.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은 듯 낯선 여행자를 경계하지 않는다. 시간이 잠시 멈춰선 듯한 이곳에서 여행자는 추억 하나를 더 만든다.여행정보

문의 : 교동도 면사무소 032-93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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