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의 격화와 양극화의 심화. 국내 유통산업 개방 20년을 읽는 키워드다. 1989년 이후 단계적으로 추진했던 유통산업의 대외 개방이 1996년에 완료됐다. 올해로 꼭 20년이 지났다. 
전면 개방 후 글로벌 유통업체들의 진출에도 불구하고 국내 유통업계는 안방을 사수했다. 이 과정에서 대형할인점은 몸집을 키웠고, 편의점과 무점포 판매와 같은 신(新)유통업태들은 급성장했다. 반면 수퍼마켓, 재래시장과 같은 영세 자영업은 끝없이 추락했다. 경쟁 격화의 결과로 유통산업의 구조가 변한 것이다. 유통산업 개방 20년을 되짚어 본다.

대한민국은 수출입으로 먹고 산다. 이른바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국가이다. 수출입 비중이 국가총생산(GDP)의 80%에 육박한다. 지난해에만 우리나라는 5269억달러 규모의 수출을 했다. 프랑스를 제치고 연간 기준 세계 수출순위 6위에 올랐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배경도 수출 확대에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한·미, 한·중 FTA를 포함해 모두 52개국과 FTA를 체결했다. 정부에서 ‘경제영토’라고 표현하는 우리나라 FTA 시장비중은 약 73.5%에 달한다. 세계 3위 수준이다.
FTA는 체결 당사국 간의 상품 수출입 장벽을 허물겠다는 것이다. 수출을 늘리기 위한 장벽을 없애는 데에는 당연히 전제 조건이 붙는다. 수입 장벽도 이에 상응하는 만큼 낮춰야 한다는 조건이다. 유통산업 개방은 국내 수입 장벽 철폐의 첫걸음이었다. “유통산업은 다른 산업보다도 앞서서 세계화라는 패러다임에 승차했고, 유통시장은 어느 시장보다 서둘러 개방해서 나름대로 적응력을 키워왔다.” 업계의 자평이다.
정부가 유통시장 개방에 나선 시점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해에 정부는 기존 ‘시장법’을 개정해 ‘도소매업진흥법’을 제정하고 이 법에 따라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중장기 유통산업발전을 위한 계획과 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1989년 제1차 유통시장개방 계획을 수립한다. 이에 따라 1991년에 제2단계 유통시장개방계획을 실시했고, 1993년 3단계 개방계획을 실행했다.

유통시장의 완전 개방은 1996년에 이뤄졌다. 정부는 이 해에 3000㎡ 이상 대형매장의 개설 허용과 20개 미만의 점포 수 제한을 철폐했다. 매장면적, 점포 수에 대한 제한 철폐는 대형점포 및 다점포화 전개의 제약을 없앴다는 것이다.
이는 1996년부터 외국 대형유통업태가 규모의 경제를 앞세워 아무런 제약 없이 국내유통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동안 소극적으로 추진됐던 외국 대형유통기업들의 국내진출이 러시가 가능해졌다. 국내 유통업계 전반은 예외 없이 글로벌 경쟁에 노출됐다.
유통시장의 빗장이 열렸을 때 국내 유통업계의 우려는 대단했다. 다국적 유통기업은 자금력, 상품력, 운영 노하우에서 국내기업들을 압도하고 있으니 우려는 당연했다.
무엇보다 다국적 유통기업과의 힘겨운 한판 승부는 중소유통기업에게 직격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또 백화점 등 기존 대형점들의 부침과 신종 업태의 등장이 예견됐다. 경쟁력을 앞세운 대기업의 유통업 참여와 이를 통한 유통업계의 판도변화도 더욱 가속될 것으로 전망됐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 업태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외국기업과의 사활을 건 시장쟁탈전으로 내몰린 유통업계는 무한경쟁의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 셈이었다.

카르푸·월마트의 철수…안방사수 성공했지만
유통시장 전면 개방 이후 글로벌 대형 할인점 카르푸와 월마트가 국내 시장에 잇달아 진출했다. 국내 유통기업들과 글로벌 업체가 하나의 링 위에 올랐다. 프랑스의 다국적 유통기업인 카르푸는 1993년 한국지사인 한국까르푸(주)를 설립한 후 1996년 7월 한국 최초의 매장을 부천시 중동에 개점하면서 국내 유통시장 공략에 들어갔다.

세계 최대 할인점 체인인 월마트는 이보다 조금 늦은 1998년 한국 마크로를 인수하면서 한국 시장에 들어왔다. 월마트가 한국 시장에 늦게 진출한 이유는 한국에 월마트라는 이름의 수퍼마켓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월마트라는 이름이 이미 상표등록이 돼 있고, 법원도 한국 월마트 수퍼마켓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월마트는 상호를 돈을 주고 구입한 후 국내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국내 유통업계는 이들 글로벌 대형 할인점의 입성으로 피해가 불가피 할 것으로 전망했다. LG경제연구원이 완전개방 원년을 맞아 국내 유통업계 실무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약 45%가 유통시장 개방으로 국내 유통기업들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했고, 9.7%는 심각한 피해가 우려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글로벌 대형마트들은 국내 시장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국내 진출 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

까르푸는 2006년 이랜드 그룹에 인수되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이후 홈에버(주)로 사명을 변경했고, 2008년 5월 홈에버(주)는 홈플러스(주)에 인수됐다. 같은 해에 월마트 역시 국내 기업인 신세계 이마트에 인수됐다. 한국 시장 철수는 월마트로서도 첫 해외 영업 실패였다. 외신에서는 월마트의 전략의 실패를 지적했다. 리테일 포워드의 선임 이코노미스트인 프랭크 바딜로는 “월마트의 ‘저가 창고형 매장’ 전략에 한국 소비자들이 반응하지 않으면서 월마트가 한국서 실패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업체들의 국내 시장 철수는 국내 유통업체들이 우려에도 불구하고 ‘안방 시장’을 사수해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안방 사수 과정에서 국내 유통계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고, 이 변화의 핵심은 중소상인의 도태였다. 글로벌 기업과 대결하면서 국내 대기업이 급성장했고, 이는 이들 대기업의 유통시장 평정에 따른 양극화를 초래했다.
유통시장 개방의 결과 동네 수퍼마켓은 힘겨운 생존 경쟁에 몸부림치게 된 반면 소비자들의 구매패턴 변화로 ‘변방’에 머물렀던 대형 할인점의 ‘무한 팽창’이 이뤄졌다. 또 틈새시장을 비집고 들어온 편의점과 무점포 판매업도 괄목할만 성장을 했다.
이는 유통개방 후 10년간을 분석한 대한상공회의소에 잘 나타나있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유통개방 후 수퍼마켓 등 소규모 점포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했다. 반면 대형 할인점과 편의점, 무점포 판매 등 신업태가 급성장함으로써 국내 소비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이 발생했다.

10년 동안의 기간을 비교한 수치를 보자. 대형 할인점의 판매액은 개방 원년인 1996년에 비해 779.6%가 성장했다. 같은 기간 동안 편의점은 197.2% 늘었으며, 무점포 판매업 역시 통계조사를 시작한 2000년 대비 70.0% 증가했다. 반면 수퍼마켓과 구멍가게 등이 주를 이루는 기타 소매업은 각각 19.4%,12.0% 감소했다.
중소상인의 몰락 추세는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김한표 의원이 중소기업청에서 받은 국감자료를 보면 전국의 나들가게(동네수퍼) 수는 2012년말 9704개에서 2014년 9062개로 642개나 줄어들었다. 이는 하루에 1개 정도 감소한 것으로 편의점이 2개 생길 때 나들가게는 하나씩 줄어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들가게의 경우 연간 매출도 2013년 1조8923억원에서 2014년 1조8508억원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국내 유통시장 개방 후 구멍가게는 크게 줄어든 대신 대형 할인점은 몸집을 크게 키웠다. 신세계 이마트를 필두로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이른바 빅3는 인수를 통한 외형 확장의 절정을 보였다. 1996년 28개에 불과했던 이들 대형 할인점은 지난해 말 320여개로 10배 이상 늘었다.
국내 대형할인점 시대는 1993년 11월, 이마트가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 1호점을 개점하면서 개막됐다. 이후 이마트는 1994년 경기 고양시 일산점, 1995년 안산점, 인천 부평점을 연이어 개점한데 이어 월마트의 한국 지점들을 인수하면서 급성장해 2015년 현재 전국 150여개 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마트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대형마트 사업에 진출한 곳은 롯데마트다. 1998년 4월 롯데마그넷으로 1호점(서울 강변점)을 열었고 같은 해 8월 월드점, 1999년 서현점 등을 꾸준히 오픈하며 현재 116개 점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테스코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한 홈플러스는 전국에 총 107개의 하이퍼마켓과 828개의 익스프레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유통시장 개방은 소비자의 구매 패턴에도 영향을 미쳐 저가의 다양한 품목을 확보한 대형 할인점으로 ‘쏠림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특히 과거 동네 수퍼마켓에서 구입하던 식료품은 대형 할인점에서 구매하게 됐으며, 전자상가나 가구단지 등에서 구입하던 내구재 역시 대형 할인점에서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늘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유통산업의 개방으로 경쟁력 있는 신유통업태들이 탄생했지만, 동시에 영세소매상의 급격한 감소를 경험했다”면서 “일본의 사례에 비춰볼 때 영세 소매업체의 퇴출은 지속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형업태 중심 유통구조 격변…업태별 극복 과제 ‘부상’
유통개방 20년은 이처럼 국내 유통구조가 극적으로 변화된 기간에 해당한다. 대외 경쟁 격화와 함께 인구의 도시집중, 교통의 편리화와 정보교환의 용이성 증대, 인구의 외곽지대로의 분산, 부도심 상권 형성 등의 환경 변화로 유통업의 대형화, 종합화, 전문화가 촉진된 것이다. 또 국민의 소득수준 향상, 여가증대, 자아실현의 욕구증대 등 개개인의 가치관이 양보다는 질, 서비스 개선 요구, 다품종 소량을 추구하는 소비구조형태로 전환돼 개방 이후 변화된 유통구조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 같이 변화된 유통구조형태는 대형할인점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통업계에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고 있다.
무엇보다 급속한 성장을 계속해 온 대형할인점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필요가 커졌다. 사이즈의 다양화와 같은 또 다른 변화를 꾀하게 된 것이다. 

대형할인점은 급속한 점포 확장과 지나친 매장면적 확대 투자, 업계 내 입지 선점을 위한 무리한 출점 등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받았다. 신규 출점이 급감한 것은 이 같은 변화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한상의는 다양한 사이즈와 형태의 점포를 개발해 지속적으로 고속 성장하고 있는 선진국 유통산업 사례를 들며 “향후 국내 할인점 업계도 식품 위주의 상품 구색으로 특화, 규모 축소를 실시해 지금보다 상권 규모가 작은 지역 중심의 근거리 수퍼마켓으로 진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또 유통개방 이후 업계 형님 자리를 내준 백화점 업계에는 차별화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통시장 개방 이후 성장 제체를 경험하고 있는 백화점 업계는 업태 경쟁력을 확보하고 할인점과 차별화하기 위해 상위 고객층을 집중 공략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백화점 업계는 이용 고객 수 감소라고 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위고객에게 집중하는 서비스와 마케팅을 실시하면서 백화점 내에 VIP룸 등 다양한 서비스 공간을 설치하면서 위기에 대응해 왔다. 할인점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백화점이 상위 고객에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에 더해 백화점은 시대적인 니즈를 리드하기 위한 럭셔리 마켓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자주적인 상품능력을 확대하는 측면에서 해외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를 백화점이 직접 판매하는 시도 등에 적극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편의점은 유통시장 개방 이후 출점 속도가 가장 빠른 소매업태로 급부상했다. 다만 편의점은 경영상의 부작용에 따른 점포 개발 능력, 가맹점 개발 능력, 상품 개발 능력, 마케팅 능력의 수준 향상이 여전히 요구된다.
특히 편의점 업계는 점포운영 미숙에 따른 낮은 생존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탁가맹점과 직영점의 비율을 낮추고 순수가맹점의 비율 확대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편의점은 현재 저마진 상품의 구성비가 너무 높아서 본부와 점포의 이익을 압박하고 있다. 하루빨리 고마진 상품의 구성비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터넷쇼핑몰, TV홈쇼핑과 같은 무점포판매업은 유통개방에 따른 또 하나의 수혜업종이었다. 이들은 2000년 이후 신규 소매업체에 대한 창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다만 무점포판매업은 기업이미지 관리 및 철저한 약속이행을 통한 고객과의 신뢰 구축이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무점포판매업은 성장과 더불어 소비자 입장에서는 과대광고의 피해 발생이 늘고, 거래업자 입장에서도 과대광고를 식별하는 데 추가적인 비용을 발생시키는 문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업계 중심의 신뢰 위원회를 구성 등 구체적인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한편 유통개방에 따라 가장 큰 위축을 경험한 중소유통업에는 정부의 지원이 보다 더 확대될 필요가 제기된다.
정부에서 중소소매업 구조의 선진화를 위해 영세 소매업체를 한계 퇴출업체와 혁신 전환 가능업체로 분류하고 각각에 대해서는 사회적 안전망 제공 및 전환 유도 지원책을 차별적으로 마련, 적용해야한다는 것이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중소유통업을 위한 새로운 지원방식으로 해당 지역의 중심시가지 상권 활성화 정책 수립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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