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다리(충북유형문화재 제28호)는 어뜻 돌무더기 같다. 자리를 조금 비켜서서 보니 교각과 상판석이 보이는 다리의 모습인데 거대한 지네가 물을 건너는 형상이다. 농다리는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뿐 누가 지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1930년대 발간된 《조선환여승람》과 《상산지》에 따르면 ‘고려 초 굴치(굴티)의 임 장군이라고 전해오는 사람이 농교를 창설했다’고 기록돼 있다. 천년을 지켜온 농다리를 찾아 진천으로 떠난다.

농다리에 감춰진 과학적 원리

농다리가 천 년 동안 끄떡없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은 과학적인 축조 방법에 있다. 구곡리를 흐르는 세금천은 가리천과 태산천이 합류한 줄기라서 수량이 많고 수심이 깊은 편이다. 더군다나 수량이 불어나는 장마철에 홍수라도 나는 날이면 거센 물줄기가 다리 위를 세차게 흘러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라 한다. 강한 물살에도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먼저 다리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튼튼한 ‘기초석’ 쌓기가 중요하다. 다음 단계로 기초석 위에 자연석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리는 ‘들여쌓기’와 ‘엇물려쌓기’를 해서 교각을 만들었다. 교각의 크기는 대체로 30~40cm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동양철학에 근간하여 별자리 28수를 응용하여 교각의 숫자를 28개에 맞춘 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교각부터 상판석까지 다리 전체에는 붉은색을 띤 돌을 사용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처럼 불그스름한 빛이 나는 돌을 사용한 것은 이 지역에 사력암질의 돌이 많기도 하겠거니와 ‘자석배음양’, 즉 음양의 기운을 고루 갖춘 돌이라는 고서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다리가 검붉은 지네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각은 직사각형이나 원형이 아닌 유선형으로 만들어졌다. 물의 마찰을 줄이고자한 의도로 물 흐름을 거스르지 않아 마찰력을 최소화 한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상판석을 얹는 것. 농다리에는 상판석의 크기에 따라 1개 또는 2개를 얹었다. 큰 것은 길이 170cm, 너비 80cm, 두께 20cm이다. 다리를 직접 걸어보니 돌이 덜컹거리고 흔들린다. 돌과 돌 사이를 석회 등으로 채워야 하는데 작은 돌로 메워서 그렇다. 비과학적인 것 같지만 물의 흐름을 막지 않으려는 비밀이 숨어 있다.

농다리 건너 초평호 잇댄 미르숲길

농다리를 건너면 용고개에 이른다. 옛날 고개 너머 화산리에 시주 갔던 승려가 있었는데 부잣집에서 시주는커녕 문전박대받으며 쫓겨났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승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앞산을 깎아 길을 내면 더 큰 부자가 될 텐데…’, 이 말을 들은 부자가 산을 깎아 길을 냈는데 알고 보니 용의 허리를 잘라 용을 죽였던 것. 이후 부자는 망했고 용고개는 살고개라 불리게 되었다.

고개 너머에는 미르숲이라 하여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길을 따라 정자와 쉼터 등 쉴만한 곳이 여럿이다. 호젓한 길을 따라 초평저수지가 그윽하게 담겼다. 수변 산책로가 잇대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끝자락에는 하늘다리가 삭풍을 이기고 매달려 있다. 이동할 때마다 조금씩 흔들거려 온몸이 서늘하다.

발길을 돌려 다시 농다리 앞에 선다. 농다리는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 다리는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소통과 문화 확장의 통로가 되었다. 또한 예술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삶의 애환과 추억이 서린 그리운 풍경이기도 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천 년 전에 지어진 농다리를 찾아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 찾아가는 길(내비게이션 검색어) : ‘농다리’(충북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

■ 문의 : 진천군청 관광팀 043-539-3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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