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바라는 건 저희를 좀 봐달라는 겁니다. 저희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는 겁니다.”

지난 11월 개봉해 화제를 끌었던 영화 ‘카트’의 클라이맥스 장면에 나오는 ‘선희(염정아 분)’의 대사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영화 ‘카트’는 이랜드 그룹이 한국까르푸를 인수해 만든 대형할인점인 홈에버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당시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7년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해고되자 510일 간 파업을 벌였다. 영화는 마트에서 일하던 주인공 선희가 정규직 전환을 약속 받은 날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다년간 서비스 평가 부문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선희는 비정규직 사원들의 우상이 된다. 하지만 어느 날 마트가 갑자기 하청업체와의 간접고용 계약을 시행하면서 대부분의 직원을 정리해고 한다는 소식이 일방적으로 통보된다.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은 선희는 물론 대부분의 사원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분노하고, 평생 ‘노동조합’의 ‘노’자도 듣지 못하며 살아왔던 아주머니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정리해고를 앞두고 회사와 협상을 시도한다. 그게 500여일이 넘는 파업으로 이어졌다. 파업 중 경찰에 끌려 나가면서 선희가 외치는 대사가 “저희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는 겁니다”이다. 이 같은 선희의 외침과 뒤이어 카트를 밀며 돌진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다.

“한 달에 받는 임금 100만원 안팎”
대형마트 비정규직 문제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이 겪고 있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노동환경을 실화로 다룬 영화 ‘카트’가 사회적으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관심이 고조됐다.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저임금·고용 불안 등으로 차별받는 근로자의 대명사로 통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근로자가 급증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자 정부는 2007년 비정규직보호법을 마련했다. 기업들이 비정규직 자리를 마구 늘리고, 차별하는 걸 막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법이 시행된 지 7년이 지난 현재에도 비정규직 숫자는 607만7000명으로 2007년(570만3000명)보다 37만4000명 늘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 격차는 2008년 134만9000원에서 2013년 158만1000원으로 더 커졌다.

비정규직보호법은 비정규직 고용 안정에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편법을 양산했다. 2년 이상은 계약직을 쓰지 말라는 취지의 법을 피하기 위해 몇 개월 단위로 계약하는 ‘쪼개기 계약’까지 등장했다. 불리한 계약에 노출된 비정규직은 이처럼 일용·임시·파견직을 전전하며 노동인권 사각지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대형마트의 계산원과 같은 비정규직은 통상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여성에다 비정규직이란 이중차별 노동구조 속에 있다. 여기에 유통서비스업 특성상 투명인간으로 치부되며 감정노동까지 감내하고 있다. 대형마트의 계산원들이 그렇게 일하고도 한 달에 손에 쥐는 임금은 100만원 안팎이다. 비정규직이라 근무 연수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임금구조다.

현 최저임금 지급규정인 시급 5210원에 맞닿아 있는 임금을 받는다. 심한 유통업체의 경우 하루 8시간 근무규정을 피해 7.5시간이란 소위 ‘점오계약제’를 강요하기도 했다.

점오계약제는 홈플러스가 하고 있는 임금체계다. 홈플러스는 자사 비정규직 사원들을 상대로 재계약 시 근로계약시간을 임의로 줄여 근로계약서에 기재하고 있었다. 업무량은 동일한데다가 노동자의 자발적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근로계약서 상 노동시간을 낮춰 기재하는 것은 그만큼 급여를 아끼려는 의도가 반영돼 있다.

홈플러스 비정규직 사원들은 재계약 할 시 근로계약서에 현행 법정근로시간인 ‘8시간’이 아닌, 30분을 뺀 ‘7.5시간’으로 계약할 것을 요구받았다. 실제 업무준비시간과 퇴근 후 업무 마무리시간 등 업무 시간까지 포함하면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이 넘어가지만 사측은 근로계약서 상에서는 8시간이 아닌 7.5시간으로 줄여서 기재했다.

하루에 7시간30분간 일하는 이른바 ‘7.5’ 사원의 경우, 시급 5450원에 주 5일 근무로 한 달에 9일가량 쉬는 점을 감안하면 월급 통장에는 매달 95만~100만원 정도가 찍힌다.

하루 6시간30분 일하는 ‘6.5’ 사원이나 4시간30분 일하는 ‘4.5’ 사원들의 월급은 100만원 근처에도 못 간다.
홈플러스에서 3년 동안 근무하고 있는 한 비정규직 사원은 “지난달 세후 86만8410원의 월급을 받았다. 하루 7시간30분 근무한 댓가다. 시급은 5450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홈플러스 경영진은 이 같은 소위 점오 계약을 ‘2004년 주 5일제 실시로 줄어들게 된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높여주고자 이 제도를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조가 느끼는 건 반대였다. 경영진이 계약 시간을 줄여서 인건비를 낮추려는 의도로 읽혔다. 근무시간 8시간을 7.5시간으로 줄여 계약함에 따라 1년간 전체 홈플러스 비정규직원 1만6000명이 받지 못한 금액을 환산하면 총 112억896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결국 홈플러스는 점오 계약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노조가 합의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점포에 이 제도가 남아 있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2016년 3월까지 순차적으로 없애겠다고 노조와 협의를 마쳤다”면서 “4.5시간도 있으니, 짧은 시간부터 (분 단위 계약을) 바꾸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청업체 활용 ‘불법 파견’ 법원 제재…전환점 될까
쪼개기 계약에 더해 하청 업체를 활용한 ‘불법 파견’ 근무는 대형마트의 대표적인 비정규직보호법의 편법적 활용이다.

사실상 직접 고용하고 있는 직원들이지만 구조상 하청업체로부터 파견 받아 근무를 시키는 형태로 운영하면서 고용의무를 피하는 편법이다.

대형마트는 소수의 직영사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력을 ‘을’인 납품 및 입점업체에서 지원받거나 인력업체 등을 통해 비정규 계약직 사원으로 채용해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대형마트가 이처럼 복잡한 고용구조를 택한 것은 근로자를 마음대로 줄일 수 있고, 고용에 대한 비용부담은 회피하기 위해서라는 풀이가 나온다.

노동사회연구소 관계자는 “대형마트는 매출은 용역·파견사원들한테 떠넘기고, 그들에 대한 복지나 임금 문제는 하청업체에 맡기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대형마트의 편법 운영에 최근 법원은 제동을 걸기는 했다.

지난 12월7일 기업형 수퍼마켓(SSM)에서 일하던 하청 노동자에 대한 ‘불법 파견’을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다. 대형마트의 최강자인 이마트가 법원으로부터 불법 파견에 대한 법적 제재를 받은 것이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42부는 권모씨 등 3명이 이마트의 기업형 수퍼마켓인 에브리데이리테일을 상대로 낸 해고 무효 청구 소송에서 “사측은 원고를 직접 고용하고, 원고에게 체불 임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소송을 제기한 권씨 등 3명의 사원은 지난 2010년부터 이마트 수퍼와 이마트 에브리데이에서 점장으로 근무했다. 이들의 소속은 이마트 또는 에브리데이리테일이 아니라 하청업체였다. 문제는 이마트가 이마트 수퍼를 에브리데이리테일에 넘기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에브리데이리테일은 넘겨받은 도급점들을 직영점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청업체와의 도급계약도 자연스럽게 만료됐으며, 이들은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러자 이들은 “우리가 실제로 노동력을 제공한 곳은 원청인 이마트와 에브리데이리테일이었다”며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속만 하청업체였을 뿐 실제로는 원청의 지시에 따라 원청의 업무를 수행했다는 주장이었다. 더불어 이들은 근무한지 2년이 지났으므로 원청이 직접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체불임금도 함께 요구했다. 재판부는 “외관상 도급 근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원고들은 실질적으로는 점포 영업점에 파견돼 에브리데이리테일로부터 직접 지휘와 명령을 받는 파견 근로관계에 있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근로 파견 관계가 인정되는 이상 현행 파견근로법에 따라 입사 2년이 지난 권씨 등은 에브리데이리테일이 직접 고용할 의무가 있다”며 “그동안 회사가 고용 의무를 지키지 않아 받지 못했던 임금까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이처럼 원청이 업무 지시를 하면서도 외형상 하청 노동자와 ‘도급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법원의 이날 판결은 유통업계에 관행적으로 자리 잡은 이 같은 파견 근로 행태에 철퇴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유통업계에는 이와 유사한 사례가 적지 않아 이번 판결이 불법 파견을 하고 있는 다른 유통업체에 미칠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유통업계에 만연한 ‘불법 파견’이 근본적으로 시정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당장에 에브리데이리테일 측은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에브리데이리테일측은 “도급점포에서 업무지시나 상하관계, 인력관리 등이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회사의 입장”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어 놓은 상태이다.

대형마트의 ‘편법고용’ 실태조사 선행돼야
이 같은 편법적인 고용으로 발생하는 비정규직 문제는 노동빈곤층 양산은 물론이고 사회 양극화를 가중시키며, 나아가서 사회 불안으로 이어지는 주요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고용 실태는 그 심각성이 극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국내 대형마트는 ‘탈법·편법고용의 백화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한 사업장 안에 대형마트가 직접 고용하는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직원 외에 인력파견업체의 용역사원(수급사원), 입점·납품업체의 협력사원(파견사원), 시간제 아르바이트 종사자 등 별의별 고용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편법이 이뤄지다 보니 정작 한 곳의 대형마트에서 일하고 있지만 떡·주류·식품·생활용품점 등 5곳의 파견 업체로부터 급여를 받는 협력사원도 있을 정도이다.

‘갑’ 위치에 있는 대형마트의 불공정거래가 만연할 수밖에 없고 힘없는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노동행위를 구제할 길이 막연한 구조인 것이다. 물론 현행법은 다른 회사에서 직원을 받아서 쓰는 파견 근로와 사내 하도급을 정당한 고용 형태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의 대형마트처럼 일감을 외부에 맡기는 도급 계약을 하고 실제로는 파견 근로자처럼 지휘 감독을 하면 불법 파견이 된다. 파견 근로는 컴퓨터 전문가, 통신기술, 조리 등의 32개 업종에만 가능하다. 나머지 업종에서 직원처럼 쓰려면 직접 채용하는 것이 맞다.

문제는 대형마트의 다양한 편법적인 고용 실태가 아직까지도 정확히 파악조차 안 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용노동부가 시행하는 주요 대기업의 제조업 고용 실태 조사가 유통서비스업까지 이어지지 않고 있어서이다.

이는 제조업체와 달리 유통업체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은 것도 한몫하고 있다고 한다. 대형마트 노동자 문제가 조직화된 관심이나 요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다 보니 대형마트의 경영논리만 작동하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문제가 깊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 종합보호책을 만들겠다는 정부가 이번 기회에 대형마트의 고용 실태를 전면 조사해서 불공정거래나 부당노동행위가 발견되면 적법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법을 어기거나 법망을 피해 온갖 형태의 고용이 이뤄지는 것이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이라고 보면, 이는 정부가 추진 중인 비정규직 종합대책의 성공을 위해서도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된다.

2014년 8월 기준 비정규직 노동자는 607만여명으로 전체 임금노동자의 32.4%에 달한다. 임금은 정규직 대비 56%, 국민연금·건강보험 가입률은 30~40%대에 그친다.

아울러 비정규직으로 몇 년을 일해도 정규직이 되는 경우는 10명 중 1~2명에 불과해 열악한 일자리의 덫에 갇힐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고용을 원칙으로 하는 것을 포함해 비정규직의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내용의 사회적 합의도 시급하다. 대형마트의 다양한 편법적인 고용 실태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은 이 같은 궁극적인 사회적 합의를 위한 첫 걸음을 떼는 일이다.

사람에 대한, 대형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이웃들에 대한 ‘공감’이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진정한 해법 마련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 ‘카트’의 감독인 부지영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싸움 안에 저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걸 꼭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말했다. 부 감독은 “이 싸움 안에 ‘우리 이웃이 있었다’라는 것을 느끼고 또 그래서 그분들에 대한 공감이 이뤄진다면, 서로 간에 반목하고 대립하는 것들이 훨씬 줄어들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유통업계에서는 “미국에서는 일하기 좋은 직장에 홀푸즈마켓과 같은 유통회사들이 자주 거론된다”며 “우리나라도 대형마트가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늘린다면 사회 전체에도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종합세트’라고 불리는 대형마트의 편법 고용 실태에 대한 파악과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면, 비정규직도 한국사회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순기능으로 주목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김지성 기자 | nexteconomy@nexteconomy.co.kr

저작권자 © NEXT ECONOM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