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칠레 FTA의‘얼굴 마담’은 와인이었다. 몬테스 알파와 같은 질 좋은 칠레산 와인을 보다 싼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말에 와인애호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정부와 언론도 그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고 홍보 효과도 컸다. 그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한∙칠레 FTA는 비교적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잠시 잊고 있던 칠레산 와인들이 요즘 자주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고 보니 조금 뜻밖이다. 관세가 사라지고 거래량이 크게 늘었는데도 불구하고 칠레산 와인의 가격은 오히려 많이 올랐다는 것이다. 관세가 인하된 만큼을 수입업체에서 마진으로 가져가고 또 수출업체도 덩달아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란다.

칠레산 키위의 신세는 이보다 더 처량하다. 한 때 대형마트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점유율 70%가 넘는 뉴질랜드 키위업체가 자사 키위를 공급받으려면 칠레 키위를 팔지 말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값싼 경쟁자가 사라지니 키위 가격이 올라간 것은 불문가지다. FTA를 맺어서 관세가 사라진 품목들의 가격이 오히려 올라간 이러한 현상을 ‘FTA의 역설’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말 많고 탈 많았던 한미 FTA가 3월 15일 0시를 기해 본격 발효됐다. 한미 FTA 발효를 통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품목 9000여 개와 수입품 8600여개의 관세가 완전히 사라졌다. 전체 대미 수출 및 수입 품목의 80%에 해당되는 수치다.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미국산 제품 10개 중 8개는 예전보다 싼 가격에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미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체리와 오렌지 등 미국산 과일에 대한 할인 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또
미국산 자동차 수입업체들 역시 수백만 원의 가격 인하 효과를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
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요란한 일회성 이벤트가 끝난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다시 가격이 올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산 체리나 오렌지가 칠레산 와인이나 키위의 길을 걷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한미FTA의 효과를 일반 국민들이 얼마나 체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좋든 싫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 상황에서 찬반의 논란을 거듭하는 것은 모두에게 무익하다. 이제 남은 것은 한미FTA에 대한 찬반이 아니라 그로 인한 이득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관세 철폐에 따른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다. 단순히 가격 인하 효과가 얼마라
거나 몇 년 간 몇 천억 원의 경제효과가 있다는 것은 일반 국민들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그저 귀에 듣기 좋은
말일 뿐이다. 말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이익이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왜곡된 유통 구조를 찾아내 고치고 또한 그 과정에서 불공정한 거래가 없는지 수입품 가격 결정과 유통 구조에 대한 감시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중간 유통업체나 일부 수입업체의 배를 불리기 위한 한미 FTA라면
체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수입상과 중간 유통업자가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국내 유통 시스템에 대
한 근본적인 개선이 시급하다.

주류 수입업자의 겸업금지와 소비자 직판 금지를 폐지함으로써 와인값 인하에 기여한 것은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공정거래위원회가 한미 FTA 발효 후 관세가 폐지되거나 인하된 품목 중 소매가격이 인하되지 않은 품목의 수입 가격과 소매가격도 공개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말 안 듣는 기업 손보기 식의 일시적인 대응책이 아니라 구조적인 개선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누구를 위한 FTA인가? 정부는 한시도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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