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를 가로지른 형산강이 양동마을에 닿으면 양동천으로 이름이 바뀐다. 마을 뒤편에는 163m의 야트막한 설창산이 양동리와 안계리에 걸쳐 병풍 역할을 한다. 마을 앞에는 안계들녘에서 드넓게 펼쳐져 마음마저 탁 트인다. 반나절 도심을 벗어나 500년 전 조선 시대의 모습이 오롯이 남아 있는 경주 양동마을을 찾아본다.

기와집과 초가가 어우러진 조선 시대 대표 반촌

500여 년 전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모여 살면서 형성된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2010년 7월 31일에 한국의 역사 마을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설창산 기슭에 기와집과 초가 15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마을 앞을 관통하는 양동천은 안락천과 만나 마을을 더욱 비옥하게 한다. 그 골을 따라 초가가 이어진다.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더욱 위엄 있어 보이는 것도 지리 지형 덕분이다. 유교 이념에 따라 철저한 계급사회를 지향했던 조선 시대의 엄격한 신분 질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두 가문의 종가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분가는 그 아래에 자리한다.

느릿느릿 양반걸음으로 양동마을 걸어보기

마을에 들어서자 설창산을 배경으로 마을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자리한다. 한 장의 엽서가 따로 없을 정도로 나무랄 데가 없다. 주차장 옆. 연못에는 연잎이 무성하다. 마치 마을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다. 마을회관 앞을 가로질러 향유경로당을 지나면 왼편에 내곡 코스로 향하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근암고택, 상춘헌고택, 수졸당고택 등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다. 대부분 ’ㅁ‘자형으로 지어 경상도 지역의 가옥 형태를 따르고 있으며 17~18세기에 지어졌다. 가장 높은 곳에 서백당(중요민속자료 제23호)이라 불리는 송첨 종택이 있다. 월성손씨의 입향조(入鄕祖)인 양민공 손소 선생이 1454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터는 설창산의 지기(地氣)가 모여 세 사람의 위인이 탄생할 거라 전해진다. 그중 이조판서를 지낸 손중돈과 그의 딸이 낳은 동방오현에 손꼽히는 회재 이언적이 있다. 가문에서는 마지막 위인이 손씨 집안에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에 시집간 딸이 친정에서 출산하지 못하게 할 만큼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한옥의 기품에 여행의 여유를 플러스하다

무첨당(보물 제411호)은 여강이씨 종가로 1460년경 회재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지어 살았다. 사랑채인 무첨당은 ‘ㄱ’자형으로 중앙에 대청이, 오른쪽에 온돌방이, 왼쪽에 누마루가 놓인 형태이다. 소박한 한옥의 기품이 느껴진다. 누마루 난간에는 장인의 솜씨를 자랑하듯 화려한 문양이 돋보인다.

마을에서 풍광이 가장 좋다는 관가정(보물 제442호)은 우재 손중돈이 분가해 지은 집이다. 관가정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사랑채 누마루에 오르면 형산강과 안강들녘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오고 소작농들의 농사짓는 모습도 한눈에 감독할 수 있어 실용성이 더 강조된 듯하다. 관가정 앞길을 따라 경사면을 오르면 향단(보물 제412호)이다. 회재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 임금이 지어준 집으로 본래 99칸이었으나 현재 56칸이 남아 있다. 별채, 사랑채, 안채로 나뉘는데 건축물마다 각각의 기능이 돋보여 건축학적 의미도 높다고 한다.

도심을 떠나 반나절 동안 흙길을 밟았다. 에어컨보다 손부채에 의지해 쉬엄쉬엄 걷는 재미를 즐겼다. 비슷비슷한 고택들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제각각 다른 색깔로 이야기를 전한다. 500년의 세월을 반나절 만에 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행의 단맛은 충분히 맛볼 수 있으니 경주로 떠나보면 어떨까?

여행정보

■ 내비게이션 정보 : 경주 양동마을(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25)

■ 여행 문의 : 070-7098-3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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