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TV에서 이런 코미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복장은 흐트러지고 모자는 비뚤어지게 쓴 사나이들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삼삼오오 걸어간다. 여기저기 침을 택택 뱉으면서 심란한 표정으로, 팔자걸음을 건들건들 걸으면서 예비군들이 모여든다.

예비군 훈련장에 도착해서 4명의 사나이가 둘러앉아 고스톱을 친다. 4명이니 1명은 광을 판다. 나머지 3명의 사나이들이 고스톱을 치는데 100원짜리이다. 그러니까 1등한 사람이 200원 따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 고스톱을 치다가 어떤 사나이가 스톱을 해서 1등이 됐다. 바야흐로 200원을 딸 순간에 다른 사나이가 속임수를 썼다고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험한 말이 오가고 말다툼과 멱살을 잡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고스톱 판은 난장판이 되었다.

광을 판 사나이가 겨우 뜯어말려 상황은 종료되었다.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돌아가면서 100원짜리 고스톱을 치다 싸움판을 벌렸던 세 사나이가 광을 판 사나이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을 한 장씩 주고 갔다. 명함을 본 사나이는 눈이 소눈깔처럼 커지면서 아연실색(啞然失色)했다.

한사람은 목사, 또 한사람은 의사, 또 한사람은 변호사였다. 사회통념상 점잖은 지식인,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이 100원짜리 고스톱을 치면서 욕설을 퍼붓고 치고받으며 아귀다툼을 했던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바로 예비군 훈련이라는 상황과 시스템, 그리고 예비군 복장과 모자,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군중이 이들의 익명성을 높여주었으며, 그 익명성은 자아정체성의 상실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예비군 훈련이 끝난 다음에야 제정신이 돌아와 자아정체성을 회복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익명성(匿名性)과 탈개인화(脫個人化), 자아정체성의 상실은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도록 만든다. 익명성이란 자신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딱히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는 상태를 말하고, 탈개인화란 맨 정신일 때 개인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집단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개인의 이성과 자제력에서 해방된 상태를 말한다. 결국 익명성과 탈개인화, 그리고 자아정체성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게 하고 일탈된 행동도 서슴없이 하게 하는 동인이 된다. 대도시에서 범죄가 많은 것은 이런 현상들과 관련이 있다.

2002 월드컵을 응원하러 거리에 쏟아져 나온 군중들의 모습을 상기해보자. 그들은 한결같이 월드컵 응원단인 ‘붉은 악마’와 같이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옷에 태극기 등의 문양을 새겨 넣거나 태극기를 두르고, 머리에는 뿔이 돋은 것 같은 이상한 모자를 쓰고, 얼굴에는 한결같이 ‘페이스페인팅’을 했다. 그들은 또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는 군중 속에 있다. 이런 상황은 바로 익명성과 탈개인화, 그리고 자아전체성의 약화를 촉진한다. 광란에 가까운 응원, 골이라도 터질 것 같으면 생면부지의 남녀가 껴안고 빙글빙글 돌면서 팔짝팔짝 뛰는 행위 등은 익명성과 탈개인화,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아정체성의 약화가 아니면 일어나기 어려운 행동들이다.

익명성을 높여주는 수단으로는 예비군 복장과 같은 제복, 가면(假面), 복면(覆面), 페이스페인팅, 모자, 가운, 짙은 선글라스 등이 많이 쓰인다. 평소에는 점잖은 신사가 예비군 복장을 하면 마치 시정잡배처럼 행동한다든지, 전통 가면극에서 우스꽝스런 가면을 쓴 광대가 평소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양반을 조롱한다든지, 도둑이 모자를 쓰고 복면을 한 채 도둑질을 한다든지, 알카에다나 SI등 테러단체들이 눈만 나오는 복면을 쓰고 잔인한 행동을 한다든지,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미국의 KKK단이 눈만 내놓고 온몸을 흰색 가운으로 가린 채 횃불 집회를 한다든지, 교통경찰이 짙은 선글라스와 헬멧을 쓰고 교통단속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익명성을 높여주어 맨 정신으로는 하기 어려운 행동을 과감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진실성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다

최근 SNS의 급속한 발전은 모든 사람들에게 익명성의 확대를 가져왔다. 아무도 모르게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아무 활동이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익명성은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순기능으로는 각종 선거에서의 비밀투표, 각종 민원이나 제보, 제도개선 청원 등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역기능이 존재한다. 가장 큰 역기능이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악성 댓글이나 폭언, 가짜뉴스 생산, 장난 신고, 금융사기 등이다. 이런 역기능은 엄청난 사회비용을 유발한다.

네트워크마케팅에서도 익명성은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온상이 된다. 익명성은 진실성(integrity)을 가릴 때 나타난다. 조직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각종 유인행위나 배팅과 소셜커머스를 통한 덤핑행위,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가짜뉴스 생산 등이 대표적인 익명성의 역기능이다.

이런 역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리더 자신부터 투명해져야 한다. 투명성은 진실성의 다른 측면이다. 학자들은 말한다. “20세기가 기술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진실성의 시대다. 진실성이 없이는 어떤 조직도 살아남기 힘들다.”

저작권자 © NEXT ECONOM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