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필립 짐바르도(Philip G. Zimbardo) 박사는 뉴욕에 거주할 때와 스탠포드 대학이 있는 캘리포니아 주 팰러앨토(Palo Alto) 시(市)에 거주할 때 느꼈던 공동체의식의 차이를 간단한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였다. 짐바르도 교수는 익명성(匿名性)이 유발하는 반사회적 효과, 그러니까 사람들이 공격 또는 침범을 유도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이 없다고 느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실시한 것이다.

연구방법은 몰래카메라(candid camera) 형식의 현장연구로, 팰러앨토와 뉴욕의 브롱크스(Bronx)에 똑같은 자동차를 방치하는 것이었다. 짐바르도 교수는 뉴욕대학교 브롱크스 캠퍼스 길 건너편과 스탠포드 대학교 길 건너편에 각각 보닛을 열고, 번호판을 없앤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를 버려두었다. 이는 시민들의 파괴행위를 부추기는 신호탄과 같은 역할을 할 터였다. 연구팀은 차가 방치된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숨어서 브롱크스의 경우에는 사진을, 팰러앨토의 경우에는 비디오를 촬영했다.

먼저 뉴욕의 브롱크스의 경우엔 연구팀이 기록 장치를 설치하기도 전에 벌써 최초의 파괴자가 나타나 약탈을 시작했다. 아버지로 보이는 이가 아이 엄마에게 트렁크 속의 물건을 꺼내라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아들에게는 차 앞좌석의 서랍을 뒤지라고 말했다. 그동안 그는 배터리를 떼어냈다. 차를 타고 가던 사람, 걸어가던 사람 모두 멈춰서 이 불쌍한 차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떼어내더니, 그 다음에는 두들겨 부수는 파괴 행진이 이어졌다. 뉴욕시에 무방비로 벌어진 차에는 파괴 행위가 몇 차례 계속되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버려진 자동차의 일기(Diary of an Abandoned Automobile, October 1, 1968)’라는 표제로 도시의 익명성이 빚어낸 이 슬픈 이야기를 실었다. 며칠 사이에 이 불운한 올즈모빌(Oldsmobile) 자동차에 가해진 도난과 폭력행위는 23건이나 되었다.

파괴자들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말쑥한 옷차림의 성인이었으며, 다른 상황 속에서라면 범죄의 유혹에 굴복하기보다는 경찰의 보호를 요청했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만일 여론조사에서 ‘더 높은 수준의 법과 질서가 필요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매우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었다. 연구팀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이 단순히 무언가를 부수는 재미로 파괴행위에 나선 사례는 단 한 건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파괴행위가 백주 대낮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팀이 준비한 적외선 필름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었다. 내면화된 익명성이 표출되는 데는 굳이 어둠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익명성의 부작용

그렇다면 팰러앨토에 버려진 자동차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차 역시 명백히 공격에 취약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런데 한 주가 지나도록 단 한 건의 파괴행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걸어가는 사람들이나 차를 몰고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이 차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아무도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비가 내리는 날 어느 친절한 신사가 보닛을 닫아주고 갔다. 마침내 짐바르도 교수가 그 차를 운전해서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 뒤쪽으로 몰고 가자 주변의 이웃 중 세 사람이나 버려진 차가 도둑맞았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짐바르도 교수는 이러한 신고정신이 ‘공동체의 정의’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영역 안에서 범상치 않거나 어쩌면 불법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이 일어날 때 행동을 취할 만큼 충분히 그 영역에 관심을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라고 말한다. 짐바르도 교수는 그와 같은 친사회적 행동은 호혜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역시 나의 재산과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짐바르도 교수가 실시한 이 짤막한 실험은 익명성,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거나 상관하지 않는 상황은 반사회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뉴욕의 시민들과 팰러앨토의 시민들이 선천적으로 선하고 악해서가 아니라 익명성이라는 것이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익명성이 거의 완벽하게 보장된다. 즉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나의 행동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팰로앨토와 같은 작은 도시(2017년 기준 인구는 약 67,000여 명)에서는 익명성이 완전히 보장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뉴욕에서는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투기할 수 있으나 팰러앨토에서는 그리 할 수 없다.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고 또 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런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 익명성으로 인한 일탈적 행위가 다반사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근거 없는 악성 댓글로 특정인을 괴롭히는 행위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행위가 익명성의 부작용이다. 네트워크마케팅에서도 자신의 행위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누구라도 일탈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다. 리더들은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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