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 사비성. 사비성이 자리한 부소산(106m)은 부여의 중심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 성왕이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쌓은 토성과 통일신라 때 성을 에워싸고 연결해 다시 쌓은 토성이 남아 있다. 산 정상부에 오르면 백마강이 한눈에 펼쳐지고 부여읍내를 발아래 둘만큼 조망이 좋다.

백제의 온기가 남아 있는 부소산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부소산은 맑은 공기와 시원한 풍경이 인심 넉넉한 부여 사람의 모습을 빼닮은 공원이다. 산성이라고 해서 산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유모차를 밀고 온 사람도 보이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온 아이도 있다. 그만큼 길이 수월하고 걷기 좋다.

삼충사에서 발길이 멈춘다. 백제의 세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사당이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현재 삼충사 터에 일본 왕이 직접 참배하는 214천m2에 이르는 ‘부여신궁’을 지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여에 도쿄 신궁과 비슷한 규모의 신궁을 지어 ‘황민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였다.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 독립을 맞이했고 결과적으로 신궁공사는 중단되었다. 그 터에 1957년 삼충사가 세워졌다.

영일루 터에는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영일대가 있었다. 지금 것은 조선 고종 때 세운 관아문 ‘집홍정’으로 1964년에 이곳으로 옮긴 뒤 영일루라 부른다. 누각 안쪽에 걸린 ‘인빈출일(寅賓出日)’현판은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해를 맞는다’는 뜻이나 아쉽게도 주변에 잡목이 많아서 일출을 볼 수 없다. 영일루에서 몇 걸음 안 가 군창지가 보인다.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두었던 창고 터로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부소산은 백제 때 ‘솔뫼’라고 부를 정도로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오래된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지만 백제시대의 나무가 아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 부여는 칠일 동안 화염에 휩싸였다고 한다.

승자의 기록이 정설로 굳어져

부소산을 걷다보면 군데군데 흙더미가 길게 이어진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토성의 흔적이다. 눈 덮인 구릉을 따라 수혈병영지와 반월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월루는 일출을 보던 영일루와 정반대방향에 있다. 누각에 서면 부여읍내와 구들래 들판,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잡목에 가린 영일루의 풍경과 비교된다. 멸망한 왕조의 안타까움 때문일까. 빛과 생명의 상징인 일출보다 어둠의 이미지가 강한 달을 더 잘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낙화암 앞에 서면 누구나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떠올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놀아난 방탕한 왕이다. 하지만 이것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한 결과일 뿐 사실이 왜곡됐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 일컬었다’고 했으며, 외교와 군사력을 안정시키고 권력 기반을 다져 민심을 얻었다고 한다.

삼천궁녀 역시 적군에게 쫓긴 부여의 부녀자들이 부소산 정상으로 도망쳐 지금의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낙화암에는 1929년에 세운 백화정이 있다. 강물소리를 따라 더 내려가면 고란사와 백제 임금이 고란초를 띄워 마셨다는 고란약수가 있다. 약수를 마시면 3년 젊어진다고 해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세 번은 족히 마신다. 발길을 돌려 부소산 서문으로 내려와 구드레나루터까지 다녀오면 부소산 산책이 마무리된다.

 

여행정보

■ 찾아가기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소산성까지 걸어서 10분 남짓 걸린다. 택시는 기본요금.

■ 문의 : 부여군청 문화관광과(041-830-2010), 부소산성(041-830-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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