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을 찾은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손가락을 꼽아야 할 정도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단종의 유배로지 잘 알려진 청령포에 도착하면 맑은 날씨는 어느 틈엔가 흐려지고 스산한 바람과 안개가 드리우기까지 한다. 내가 방문하는 날에만 생기는 일기상의 징크스인가? 아니면 다른 우연인가? 단종이 죽은 지 55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애절함이 가득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저런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영월을 다녀왔다.

한양이 그리워. 왕비, 당신이 그립소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렸다. 작년에 왔을 때 보다 배의 규모가 더 커진 듯하다. 아마도 찾는 발걸음이 많아진 탓일 게다. 나루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왕방연의 시조비가 있다. 청령포를 찾는다면 꼭 한번 시조비 앞에 서서 시조를 읊어보길 바란다.
배는 방향을 바꾸고 얼마가지 않아 청령포 자갈밭에 승객을 내려놓았다. 어린 임금이 이곳으로 유배 와서 죽음을 맞기 전까지 그가 살아온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청령포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단종어가를 먼저 찾았다. 어가에는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시중을 들던 궁녀와 노비들이 기거하던 사랑채로 나뉜다. 방안에는 무표정한 밀랍인형이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데 무심한 그 모습이 애달픈 마음을 더한다. 군주를 향해 예를 갖추는 것은 사람만이 아닌가 보다. 청령포에 있는 소나무들은 모두들 어가를 향해 머리를 조아린 신하처럼 한 방향으로 몸을 틀고 있다.
우거진 소나무들 사이에서 유독 우뚝 솟은 노송이 있다. 관음송이다.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 유배 당시 마음 줄 곳 없던 단종의 심경을 볼:관(觀), 들을:음(音) 소나무:송(松)이라 하여 소나무를 의인화 했다. 천일을 하루처럼 울고, 하루를 천일처럼 절규하던 그 모습을 소나무는 기억이라도 하듯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라고 있다. 관음송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한양에 두고 온 왕비를 생각하며 돌멩이를 하나씩 쌓았다는 망향탑을 만날 수 있다. 발끝을 들어 탑 뒤를 내려다보면 몸이 순간적으로 움츠려 드는 낭떠러지가 보이고, 그 아래에 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저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쳐가다 보면 어느새 한강에 다다르고 이윽고 왕비가 있는 한양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을…. 부질없는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제 갓 열다섯 살 넘은 어린 임금은 하루도 빠짐없이 애통한 눈물을 흘리며 극단적인 상상을 했을 법하다.

임금이시여, 이곳에 편히 쉬소서


단종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에 장릉을 빼놓을 수 없다. 자동차로 5분여 거리에 위치한 장릉은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더욱 뜻 깊은 곳이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청령포에서 비통한 시간을 보내다 꽃다운 나이 17세 되던 해에 죽임을 당한 단종. 그 주검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도 없게끔 강에 띄워졌다. 세조의 서슬 퍼런 후한이 두려워서일까, 아무도 시신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호장 엄홍도가 그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의 능이 있는 이곳에 암매장했다고 한다. 누군들 목숨이 귀하지 않을까? 그 역시 임금(세조)의 엄명을 거역하면 어떤 일이 있을지 불을 보듯 알고 있었겠지만 그에 굴하지 않았다. 이후 숙종 때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고 암매장된 곳을 왕릉으로 정비했다. 단종 사후 240여년이 지나서이다. 장릉은 임금의 능이지만 다른 능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무덤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해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을 일컫는 병풍석과 난간석도 세우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릉은 공원처럼 숲이 잘 조성되어 있어 여름 더위를 식히기에도 좋은 곳이다. 바쁘게만 살아가는 요즘, 일상의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영월에서 참 휴식을 가져보면 좋겠다.

●여행문의 :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 67-1 / 전화 1577-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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