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미의 <당분간 인간> 김지성의 북~ 한줄 읽기

얼어붙은 눈은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고 위험하다. 부딪히거나 긁히기만 해도 바로 피가 맺힌다. 손등에 난 피를 혀로 핥고 나서 남자는 발로 삽을 꾹 눌렀다. …중략… 폭설이 이 도시가 아니라 남자의 인생에 쏟아져 내린 것 같았다. 팔다리에 힘이 빠질수록 남자는 한 마리의 두더지가 되고 싶었다.
- 서유미의 소설집 ‘당분간 인간’ 속
   <스노우맨>(창비 펴냄) 중에서.


직장인도 ‘인간’이다. 하지만 서유미의 첫 번째 소설집 ‘당분간 인간’에 등장하는 직장인들은 ‘당분간’만 인간이다. 다들 직장인이라는 이유로 무엇인가로 변하거나, 부조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직장인이기에 인간답게 살기 어려운 ‘인간’의 이야기들이 담겼다.
<스노우맨>은 폭설을 뚫고 출근을 하려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기록적인 폭설로 도시가 마비됐지만 남자는 회사 내에서의 ‘자리 보존’을 위해 출근을 감행한다. 삽 한 자루를 들고 눈을 치워 가면서. 출근길은 막막하다. 그러나 처자식과 함께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회사에 나가야 하는 남자는 ‘삽질’을 멈출 수 없다.
<저건 사람도 아니다>에서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느라 지친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육아와 직장 생활의 병행을 위해 이 여자는 비밀리에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로봇 도우미’의 도움을 구한다. 그리고 이 여자는 완벽한 능력을 지닌 로봇 도우미에게 밀려 어느새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처지가 된다.
표제작인 <당분간 인간>의 주인공은 간신히 들어간 새 직장과 이웃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와 상처 때문에 점점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심지어 부스러지기까지 하는 기이한 증상에 시달린다. 반면 그의 전임자는 갈수록 몸이 물렁해지는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중이다. 증상을 감추며 버텨내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주변의 상황은 힘들어지기만 한다.
<삽의 이력>의 남자는 도시개발의 기초 작업이라는 명분으로 무작정 공터에서 구덩이를 파는 일을 한다. 그런데 그는 구덩이를 파는 족족 다음날이면 말끔히 메워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또 다른 남자가 같은 이유로 무작정 구덩이를 메우는 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남자 모두 각자의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무의미한 ‘삽질’을 멈출 수 없다.
서유미 작가는 “일의 근원을 봤을 때 우리가 그러지 않나. 삽질처럼 너는 파고 나는 묻고. 근원적인 접근을 하면 그렇다”고 말한다. 서른셋에 등단한 작가는 7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다. 잡지사 기자였고, 일반 회사의 홍보, 학원 강사도 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자신이 보고, 경험한 직장생활을 한 발짝 물러서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독자들이 소설 속 직장인에게 오히려 깊이 공감 할 수 있는 이유다. ‘당분간’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답게’ 살아가기 어려운 직장인들의 아이러니에 대한 공감이다. 이 책에는, 그러나 ‘해법’은 없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작가는 “따뜻한 위로를 드릴 순 없는데, 내 삶만 고달픈 것은 아니고, 우리는 자기 몫의 삽을 들고 자기 몫의 눈 더미를 치우면서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마음을 갖고 가느냐는 것이고, 서로를 보듬고 바라보아 주는 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노우맨을 보면 (주인공이) 삽질을 하다가 편의점 눈사람을 보면서 웃는 장면이 나온다. 삽질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제자리 머물지 않고, 잠깐 고개를 들었을 때 본 작은 위로가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것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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