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기업에게 ‘배우자’…전문화와 경영위기 대응력

글로벌 경기 위축과 저성장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업을 둘러싼 위험과 도전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대외 환경의 빠른 변화 속에서 100년을 지속하는 기업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힘든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수출주도형 기간산업이 외부 환경 변화에 취약하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장수 기업의 출현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다. 실제로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의 기업에 비해 우리나라는 100년 존속 기업의 존재가 미미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이 100년 장수의 희망을 현실화하려면 선진국의 100년 기업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하고, 어떤 노력이 필요한 지를 살펴봤다.

100년 넘은 ‘장수기업’ 7개…한국기업 평균역사 16.9년
지난 9월 재벌닷컴이 흥미로운 자료를 냈다. 자산 100억원 이상(2013 회계연도 기준)을 기록한 상장사와 비상장사 3만827개사를 대상으로 기업연혁을 조사한 결과 전체 평균 기업 역사는 16.9년으로 나타났고 발표한 것이다. 또 재벌닷컴은 국내 기업 중 창업 100년이 넘은 ‘장수기업’이 두산, 신한은행(옛 조흥은행), 동화약품, 우리은행, 몽고식품, 광장, 보진재 등 7개에 불과하다는 것도 확인했다. 창업 50년이 넘은 기업도 전체의 2%에 그쳤다.

국내 최장수 기업은 올해로 창업 118년을 맞은 ‘두산’이다. 1896년 설립된 두산은 창업주인 고 박승직 회장이 서울 종로에 세운 ‘박승직 상점’이 효시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두산상회’로 상호를 바꾸면서 현재의 두산그룹을 일군 모태가 됐다.

두산그룹(회장 박용만)은 올해 6월말 기준 지주회사인 두산을 비롯해 두산중공업, 두산건설, 두산인프라코어, 오리콤 등 23개 국내 계열사를 거느리고 창업 3~4세가 경영을 이끌고 있다. 신한은행은 1897년 설립된 최초 민간은행인 조흥은행(옛 한성은행)을 2006년 통합하면서 117년의 역사를 지니게 됐다.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은 1897년 9월 세워진 ‘동화약방’이 모태다. 1899년 설립된 상업은행(옛 대한천일은행)의 후신인 우리은행은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경영난에 처하면서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2002년 현재의 상호로 다시 변경했다.

‘몽고간장’으로 유명한 몽고식품은 1905년에 설립돼 109년간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국내 최초 상설시장인 서울 종로5가 광장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광장’은 103년, 인쇄 출판업체인 보진재는 102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아울러 기업역사별로는 창업 100년 이상된 7개 기업을 비롯해 ▲90년 이상 10개사 ▲80년 이상 13개사 ▲70년 이상 21개사 ▲60년 이상 192개사 ▲50년 이상 415개사로 나타났다.

창업 반세기를 넘긴 곳은 전체의 2.13%인 658곳에 그쳤다. 이어 ▲40년 이상 1203개사 ▲30년 이상 2141개사 ▲20년 이상 5553개사 ▲10년 이상 1만2451개사였다. 창업한 지 10년 미만에 불과한 신생 기업은 8821개사로 집계됐다.

전국 16개 시도별(본사 소재지)로 놓고 보면 인천 소재 기업의 역사가 평균 18.9년으로 전국에서 가장 길었다. 이어 부산과 강원 소재 기업이 평균 17.8년으로 나타났다. 전체 조사대상 기업의 절반을 차지한 서울과 경기 소재 기업은 평균 17년이었다. 반면 제주 소재 기업의 평균 역사는 13.6년으로 전국에서 가장 짧았고, 울산(15.1년), 광주(15.3년), 전남(15.4년), 전북(16.2년), 충남(16.3년) 등의 순으로 기업 역사가 짧았다.

창업 100년을 목전에 둔 ‘장수기업’도 있다. 목재합판으로 성공한 성창기업(1916년 설립), 대전피혁의 후신인 KR모터스(1917년 설립)는 100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국내 최초 국민주 모집으로 출범한 경방(1919년 설립)도 95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 밖에도 강원여객(1921년 설립), 부동산 임대업체인 대륙지에스(1922년 설립), 조선화재의 후신인 메리츠화재(1922년 설립). 삼양홀딩스와 하이트진로(1924년 설립)이 창업 90년을 넘었다.

1000년 넘는 장수 기업의 천국 일본…가업승계 활발
우리나라에 100년 넘은 장수기업이 적은 것과는 반대로 일본은 장수기업의 천국이다. 100년 뿐만이  아니라 1000년이 넘은 기업도 적지 않다. 오랜 동안 각 지역의 다이묘가 지배하는 세월을 겪어 지방마다 가업을 이어 온 기업이 많은 덕분이다.

한국은행이 내놓은 ‘일본기업의 장수요인 및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일본에는 창업 이래 1000년 이상 존속하고 있는 장수기업이 7개사가 있다. 500년 이상은 32개사, 200년 이상은 3146개사, 100년 이상은 약 5만개사가 존재하고 있다.

장수기업의 평균 존속 기간은 197.8년, 세대수는 7.2대, 종업원수는 115.7명으로 조사됐다. 종업원 규모는 300명 미만이 89.4%로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며, 300~999명은 6.3%, 1000명 이상은 3.7%에 불과했다.

한국은행은 같은 보고서에서 일본 장수기업들이 21세기를 주도할 최첨단 소재·부품기술을 보유해 일본경제의 근간을 지탱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이들 장수기업은 고용의 안정, 식생활·의류를 비롯한 일본인의 문화생활 선도 등 경제 내·외적으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또 일본경제가 1980년대의 엔고와 1990년대의 장기불황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소재·부품 등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장수기업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분석했다.

이들은 고유기술로 개발한 첨단부품으로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용안정과 일본의 문화형성에도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에는 1000년을 이어 온 노포(老鋪)들이 있다.
일본은 578년 백제에서 건너가 세워진 건축회사 ‘공고구미’(1427년)를 비롯해 1000년이 넘는 노포가 10곳이나 된다.

이처럼 일본에는 거대기업은 물론 작지만 강하고, 질긴 생명력을 지닌 장수기업들이 있다. 이러한 기업들이 일본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행은 일본에는 창업 100년 미만 기업 중 고유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 다수 존재하고 있는 데다 기업의 장기적 존속을 위한 다각적인 대책을 추진하고 있어 장수기업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면서 장수기업의 존재는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고유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을 발굴하여 장기적 관점에서 육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세계화의 진전으로 국경을 초월한 기업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식 경영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부상하면서 기업의 장기적 존속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면서도 “장수기업이 창출할 수 있는 가치에 주목해 우리나라도 적극적인 육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뿌리가 깊은 생존력…한국 ‘노포’들의 힘은?


초우량 대기업도 일순간에 망한다. 장수의 비결은 거대함과 강함에 있지 않다. 특히 최근 소니와 GM같은 글로벌 기업이 흔들리는 모습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유가증권 상장사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도 일본과 같이 선대의 가업을 이어 온 노포들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김용범과 이기창이 펴낸 ‘한국 최고의 가게’라는 책에서 우리나라의 노포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가게는 한결같이 최고(最古)를 넘어 최고(最高)를 지향하며 한국의 장인정신의 대를 잇고 있다.

노포란 역사가 오래된 가게를 말한다. 동양에서 ‘노(老)’라는 의미는 단순히 늙었다는 것 외에 존경의 뜻을 담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노포들은 불변의 경영철학을 담은 강소기업들이다. 대중화와 전문화의 갈림길에서 전문화의 길을 택해 살아남은 가게들이다. 저자들은 최소한 50년이 넘은 가게 그리고 2대 이상 가업을 계승하는 것을 노포 선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 노포들은 우리나라만의 장수·생존의 노하우를 전해준다. 그 노하우가 한국경제의 핏줄로 작용하는 경제주체로서 백년, 천년을 존속하기 바라는 바람을 담고 있다.

89년째 ‘고객하나에 옷도 하나’라는 고집으로 장수를 누리는 종로 양복점의 재발견도 그 바람의 일환이다.
종로 양복점은 한우물경영의 대표주자이다. 강소기업이 되려면 그 업계에서 ‘으뜸’이라 일컬을 만한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기술력을 축적하려면 한 우물을 파내려가야 한다. 또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으로 100년을 지켜온 광신 한약방은 신뢰경영의 표본이 될 수 있다. 신뢰경영, 가격, 품질, 시간, 지식 등의 요소들이 경쟁력 확보에 중요한 인자임에 틀림없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가 “한국경제가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단지 생산자를 알려주는 트레이드마크 단계에서 벗어나 소비자에게 믿음과 감성을 줄 수 있는 트러스트마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광신 한약방은 일찍부터 ‘신뢰’를 만들어 지금까지 왔다.

한국미술발전과 맥을 같이하는 ‘90년 붓의 명가’ 구하산방도 주목할 만하다. 문화경영, 제품, 가격, 유통전략은 경영에 필수적 조건들임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구하산방은 ‘문화’를 토대로 한 고객과의 대화로 성장했다. 사람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상품만을 구하지 않는다. 의미나 상징과 이야기를 사고자한다고 보면 구하산반의 가치가 더 커 보인다. 약 1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안성맞춤’ 유기공방은 장인정신의 대명사다. 까다로운 공정만큼 정교한 노하우가 담겨있다. 명품경영으로 100년 기업의 전통을 만들고 있다.

명품은 대량생산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하나 사람 손에 의해 태어난다. 명품에는 제품 중심의 문화가 아닌 가치 중심적 문화가 전제조건이다. 문화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특히 전통이라고 해서 마냥 훌륭하거나 좋은 것으로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아니다. 고객에게 미래창조를 위해 참다운 의미가 제공돼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유기공방은 가정에까지 스며든 문화상품을 제공하며 생존력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00년 기업의 조건…바이탈 사인을 체크하라
‘대마불사’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옛말이 됐다. 한창 잘나가던 기업들의 몰락도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경제상황과 대내외 환경이 급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기업이 100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세계기업들의 평균수명 13년. 30년이 지나면 80%의 기업이 사라진다는 통계수치를 보면 기업들이 만만한 조건에서 100년을 지속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100년 기업을 만들기 위한 실마리의 일단은 케빈 케네디의 저서 ‘100년 기업의 조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케빈 케네디는 이 책에서 기업이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으로서 경영위기에 대한 대응력을 꼽았다.

각 사건이나 원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적 오류에서 기업이 실패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시스템의 개선(혹은 혁신) 없이는 도처에 산재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실패위험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특히 시스템적 준비가 취약한 우리 기업들이 주의 깊게 경청해야할 대목이다.
케빈 케네디는 경영상의 위기를 부를 수 있는 4개의 조건들을 지목하고 있다. 이 4가지 위기들을 초래하는 조건들을 잘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면 그만큼 장수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이 4가지의 위기들은 4가지의 기회일 수도 있다. ‘경영’ 측면의 위기 조건 4가지는 혁신, 제품교체, 전략, 얼라인먼트이다. 아울러 기업의 건강상태를 감시하는 바이탈 사인(vital sign)을 장수기업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지목하고 있다.

기업규모가 커질수록 관심을 기울여야 할 요소들이 많고 특히 위험신호를 잘 파악해야 한다. 기업을 위기에 빠뜨릴 요인들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강을 점검해야 하듯, 기업 또한 건강을 진단하는 법이 중요하다. 이 책이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바로 기업들도 건강을 정기적으로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100년 정도 장수하려면 이러한 바이탈 사인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하고 미래를 대처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직 내 당신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는 능력이 점차 감소하는 현상을 ‘글레어’ 현상으로 칭한다.

글레어가 생기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한 능력이 사라진다. 글레어는 보통 천천히 발전하기 때문에 기업은 글레어가 생기는 것을 잘 포착하지 못해 그것을 해결하기보다는 보통의 경우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저마다 자기의 관심에만 집중하게 되면 각자 근시안적인 시각을 갖게 되어 회사 내 누구도 장기적이면서 기업전체에 중요한 목표 달성에 집중하지 못한다. 이런 글레어를 정확히 진단해 건강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리더의 역할이면서 동시에 시스템의 얼라인먼트 기능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손동원 인하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우리나라 기업토양에서 100년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기업현장의 소리가 잘 전달돼야 하고, 기업 내적인 조건만이 아닌 기업생태계 조건이 성숙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물론 모든 기업들에게 적용되는 100년 기업을 위한 단 하나의 ‘조건’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제시하는 조건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고민한다면 우리나라 100년 기업의 가능성은 그만큼 커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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