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체류기간, 비싼 몸값, 겹치기 출연으로 ‘퇴출’

#홈쇼핑 마니아 정모(37)씨는 요즘 즐거움이 하나 사라졌다. 잠들기 전 홈쇼핑을 통해 날씨한고 풍성한 금발 외국 모델들의 속옷을 감상하며 하루를 마무리 했지만 몇 해 전부터 방송에서 외국 속옷 모델들이 출연이 줄어들더니 지금은 아예 모습조차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주부 이모(44)씨는 몇 년 전 란제리를 입은 여성 모델들이 성인방송이나 다름없을 만큼 선정적인 모습으로 나오거나 쇼핑호스트들이 구매를 자극하기 위해 저속한 표현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홈쇼핑 방송을 중학생 시청하는 것을 보고 민망해 한 기억이 있다. 이후 남편과 상의해 케이블을 방송을 끊었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선정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외국 속옷 모델들이 TV홈쇼핑에서 사라졌다. 홈쇼핑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올해로 17년,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속옷 방송 트렌드가 바뀌고 있는 셈이다.

속옷은 홈쇼핑의 주력 상품군 중 하나다. 지난해 국내 언더웨어 시장 규모는 1조7000억원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업계에서는 전체 시장의 20~25%를 홈쇼핑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실속 구매 경향이 강해지면서 오프라인 매장에서 제품을 확인한 후 가격이 저렴한 홈쇼핑에서 제품을 구매하는 경향이 높아지면서 비중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홈쇼핑에서 속옷 방송 편성 비중은 전체 상품 대비 5%대, 매출 비율은 10%대에 이를 만큼 높은 편이다. 주로 방송하는 시간대는 평일 오전, 12시 이후 심야, 주말 낮 등에 방송하고 있다.

18~21시까지(공휴일 19시~21시)는 홈쇼핑 업체들 모두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속옷 판매 방송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 같은 매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속옷에 대해 홈쇼핑사들은 새로운 속옷 브랜드 개발에 노력을 아끼지 않아 왔다.

특히 노출 패션이 유행하는 여름은 속옷이 가장 잘 팔리는 대목이기 때문에 상품의 착용 모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속옷 모델의 섭외는 필수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홈쇼핑 초창기였던 90년 대 후반까지는 궁여지책으로 누드모델들을 섭외해 속옷 방송을 만들었다.

그러나 누드모델들의 비싼 출연료에 비해 서양인 모델보다 맵시가 떨어지고 홈쇼핑 시청률이 높아지면서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누드모델들이 홈쇼핑 출연을 중단했다.

누드모델들이 그만 둔 자리는 러시아 출신 모델들과 한국인과 비슷한 중국 출신 모델들이 자리를 채웠다.
볼륨감 넘치는 몸매와 속옷 맵시에 주부들은 부러운 시선을 보내고 남성 시청자들은 호기심 가득 찬 눈빛을 보내며 방송 시청률 상승과 제품 판매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외국인 모델의 채용은 대부분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이뤄졌다. 심지어 속옷 상품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2000년대 초반 일부 홈쇼핑 업체가 유럽 현지에서 모델 대회를 개최하기도 할 정도로 외국인 모델을 큰 인기였다.

모델들은 비자문제 때문에 3개월 단위로 계약하고 단독 출연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벨로루시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 유럽 동구권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모델료는 국내 B급 모델 수준이다.

하지만 선정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해 언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특정 부위를 클로즈업하거나 대부분 C컵 가슴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 모델이 국내 상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B컵의 브래지어를 착용, 터질 듯한 모습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퇴출이 불가피 했다는 분석이다. 

“최근 홈쇼핑 란제리는 브랜드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 브랜드와 차별화하는 브랜드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위해서는 속옷 브랜드의 이미지에 맞는 모델이 아주 중요한데 외국인 모델들의 경우 체류 기간이 짧아 한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출국해야 하는 경우가 잦고, 체류 기간 내에 홈쇼핑뿐 아니라 여러 곳에 겹치기 출연을 하기 때문에 생방송 스케쥴을 모두 소화하기도 힘들다.

원더브라 방송을 시작으로 최근 홈쇼핑 란제리 프로그램의 트렌드는 브랜드와 가장 잘 맞는 해외 모델을 섭외, 미리 영상물과 스틸컷을 제작한 다음 방송 때마다 보여주는 것이 됐다” 김현정  GS샵 속옷담당 PD의 설명이다.

마네킹 사용도 ‘한 몫’
이외에도 가족 시청 시간에 대한 배려도 TV홈쇼핑에서 속옷 모델이 사라진 또 다른 이유로 꼽힌다.
지난 2007년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가 ‘상품 소개 및 판매방송 심의에 관한 규정’을 만들면서 속옷 상품 관련 프로그램의 경우 06시부터 22시까지는 속옷 착용 모델 출연을 제한했다.

청소년 보호시간으로 규정된 오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이른바 ‘골드타임’엔 속옷 판매를 아예 할 수 없게 됐다. 또한 과도한 신체 노출이나 신체 특정 부위를 부각해 선정적으로 방송하는 것도 금지됐다.
이에 따라 홈쇼핑 업체들은 오전이나 낮 시간 주부 대상으로 하는 속옷 판매 방송에는 마네킹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대신 드레스 등 겉옷을 갖춰 입은 모델들은 옷걸이 걸린 속옷들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여기에 6개사 체재가 되면서 경쟁이 심해진 홈쇼핑사들의 제작비 줄이기도 속옷 모델이 사라지는데 한 몫을 했다는 평가다. 그나마 최근에는 겉옷을 입은 모델들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쇼핑호스트들이 속옷이 살짝 보이게 겉옷을 입고 주로 마네킹을 이용해 상품에 대한 설명 위주로 진행한다.   

최근에는 마네킹도 다양해졌다. 토루소라고 하는 몸통만 있는 마네킹이 주로 이용되는데 마네킹 안쪽에 조명을 밝혀 상품의 원단이나 얇기, 봉제 등을 자세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이나 상품의 고급스러운 느낌을 부각하기 위해 살색 대신 흰색, 검정색 등 브랜드에 따라 각각 다른 마네킹들이 이용된다.

“홈쇼핑 초창기에는 속옷 모델들을 기용해 시선을 끌고 채널 서핑을 멈추게 했던 방송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실제 속옷을 구매하는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송을 만들고 있다. 속옷 모델을 기용하지 않아도 오히려 더 높은 매출을 올리는 것은 시청자들의 달라진 시청 패턴을 대변한다.” 김 PD의 분석이다.

실제로 GS샵은 원더브라, 스팽스, 모르간, 비비안, 코데즈컴바인, 세실엔느, 코튼클럽, 푸마, 필라, 트라이, 란체티 등의 속옷 브랜드를 선보이며 지난해 속옷에서만 1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총 550시간을 속옷 방송에 쏟은 CJ오쇼핑도 피델리아 450억원(취급고), 아키 바이 아사다미와 350억원 등을 기록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저작권자 © NEXT ECONOM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