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에게 두 번째 선택을”…가격 파괴∙중고 판매∙렌탈 확대

 “20년 영업인생에 이런 불황은 처음 봤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백화점에서 잡화 브랜드를 오랫동안 취급하고 있는 영업매니저의 말이다.

장기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유통업계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불황 앞에는 장사가 없고, 소비자들은 냉혹하게 지갑을 닫고 있다.

소비 위축의 여파는 지식경제부가 지난 18일 발표한 ‘5월 유통업체 매출동향’에서 숫자로 표현됐다. 지경부에 따르면 대형마트의 5월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7%나 떨어졌고, 백화점은 1.0%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백화점의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올랐다고는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위안이 되는 것도 아니다.
1인당 구매 단가가 백화점의 경우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9%나 줄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의 구매 단가가 1.3% 줄어든 것과 비교해도 두 배 이상 감소했다. 매출은 소폭 늘었지만 구매단가가 크게 줄었다는 것은 그 만큼 백화점도 ‘박리다매’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실제로 같은 자료에서 구매건수 증감현황을 보면 대형마트는 4.3% 감소한데 비해 백화점은 오히려 4.0% 증가했다.

5월에 백화점을 찾은 고객의 구매 패턴이 ‘저렴한 제품을 많이 구입하는 양상’으로 드러났다는 의미다. 백화점에서조차 실속형·알뜰형의 가치소비가 늘고 있는 셈이다.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이 이처럼 빠르게 불황형으로 변하면서 유통업체는 가격 파괴, 중고 판매, 렌탈 서비스 확대로 표현되는 불황 마케팅에 돌입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른바 불황 마케팅이 대세가 됐다”며 “얼어붙은 소비 심리를 녹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가격 파괴’ 상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온·오프라인 매장에 상관없이 상식을 뛰어넘는 50% 세일 상품이 연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중고품 시장이 불황 속 호황을 누리면서 온라인 쇼핑몰을 필두로 유통업체들이 이 시장에 뛰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지 않고 빌려 쓰는 ‘렌탈 비즈니스’가 주목 받는 것도 불황기의 특징인데, 대형마트들이 성장성에 기대를 걸면서 발을 들여 놓고 있다. 
 
가격 파괴에 24개월 무이자 판매도
경기 불황으로 대형마트와 TV홈쇼핑에는 사상 처음으로 ‘24개월 무이자 할부’가 등장했다. 지금까지 유통업체들은 3개월 무이자 할부 판매가 보통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조치다. 가격이 비싼 가전제품의 경우도 12개월 할부 서비스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TV홈쇼핑업체 GS샵은 최근 LG전자의 LED 스마트TV 3개 제품을 24개월 무이자 할부 판매하는 방송을 진행했다.

롯데마트도 하나SK카드와 제휴해 LG전자 LED TV 40여개 품목을 24개월 무이자 할부 판매했다. 무이자 할부를 24개월 동안 진행하면 유통업체들의 이자 부담이 적지 않게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위축된 소비 심리와 부진한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업체들의 판단이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2년 동안 나눠서 결제하도록 하는 것은 부담스런 대목이기는 하지만 고객들의 반응이 대체로 좋았다”고 자평했다.

백화점은 할인 경쟁에 들어갔다. 롯데백화점은 최근 화장품·가전제품 등을 구입할 때 구매금액의 7%를 상품권으로 증정하는 행사를 전점에서 확대 실시하기로 했다. 일부 점포별로 행사를 진행하긴 했지만 전점에서 동시에 실시하는 것은 2006년 이후 6년 만이다.

신세계백화점은 시즌 오프 행사를 열고 올해 봄·여름 상품을 정상가보다 20∼30% 할인된 가격에 판매했다.
시즌 오프 행사 기간에 맞춰 점포별 여름 의류 할인 행사도 진행된다. 본점은 ‘아이올리 페스티벌’을 열었고, 영등포점도 ‘남성 캐주얼 여름 상품 특별전’을 열었다. 행사기간 중에는 최대 70%까지 할인 된 원피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현대백화점도 시즌오프 행사를 진행했다. 60여개 브랜드를 20∼30%의 할인해 판매했다. 한편 정가 판매를 고집했던 편의점도 경쟁적으로 가격할인 마케팅에 나서고 있는 모습도 나타났다.

보광훼미리마트, GS25, 세븐일레븐, 미니스톱 등 주요 편의점 업체들은 맥주·와인·아이스크림 등 일부 품목을 20~70% 할인해 판매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편의점도 동네 단골 장사가 된 만큼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미끼 상품 전략으로 보고 있다.

중고판매 ‘불황 속 호황’
경기침체로 소비자들이 실속 소비를 중시하면서 중고시장은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새것만 고집하지 않고 중고품을 찾아 온라인 중고매장을 찾는 ‘알뜰’ 소비자가 크게 늘었다. 또 중고 명품 매장에서도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업계에 따르면 지난 5월 오픈마켓 11번가 중고몰에서 판매된 중고상품 매출은 전년보다 240% 상승했다. 중고물품을 판매하는 판매자도 올해 들어 전년 대비 220% 급증했다. 옥션, 인터파크 등 온라인 쇼핑몰 올해 1·4분기 중고상품 이용률도 지난해와 비교해 두 자릿수 이상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거래 품목도 다양해지고 있다. 노트북과 디지털카메라 같은 IT 기기에 치중됐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IT기기를 넘어 중고명품과 의류, 도서 같은 일반 소비재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전체 거래된 중고품 중 의류·패션잡화 카테고리 비중은 올해 들어 30%를 기록하는 등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남성의류 중고품 구매 성장률은 전년 대비 30%대를 기록해 여성의류 성장률 보다 3배가량 높아 주목됐다.
이에 따라 대형 온라인 쇼핑몰들도 올해 중고 상품 전문관을 새롭게 오픈하는 등 중고매장을 찾는 소비자들 사로잡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11번가에서는 올해 중고 상품 전문관을 새롭게 열고 중고 상품 확보에 나서고 있다. 옥션의 중고제품 거래 코너인 ‘옥션 중고장터’에서는 전용택배시스템을 도입했고, 등록절차 간소화를 통해 개인 간 거래자들도 손쉽게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도록 했다.

11번가에서는 중고 상품을 구매한 후 30일 이내 제품에 이상이 발생하면 사후 관리 비용을 최대 11만원까지 보상하는 제도인 ‘안심구매서비스’ 제도도 도입했다.

중고 명품 매장을 찾는 이들도 늘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고이비토, 구구스 등 다양한 중고 명품 매장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중고 명품은 이미 검증 된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하려는 고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중고 명품 매장의 가장 큰 장점은 실속 있는 가격으로, 물건의 상태가 좋을 때는 평균 15~20%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물건의 상태가 나쁠 경우에도 수리와 보수를 거쳐 최대 50%까지 할인된 가격으로 명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백화점 상품 중 인기가 좋아 오래 기다려야 살 수 있는 제품을 바로 구입할 수 있다는 것도 중고 명품 매장의 매력이다.

한편 중고 명품시장의 인기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고객의 발길도 많아지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해보다 남성 손님이 4배가량 늘었다”고 밝혔다.

빌려 쓰는 시장 ‘진출 잇달아’
불황이 장기화 되면서 유통업계는 사지 않고 빌려 쓰는 ‘렌탈 비즈니스’에 주목 하고 있다. 렌탈 시장이 커지는 것은 불황기의 한 특징이기도 한데, 대형마트들이 직접 이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올해 초 가전제품 렌탈 서비스를 시작한 이마트에서는 최근까지 누적 계약 건수가 6200건을 돌파했다. 홈플러스와 GS샵도 렌탈 서비스 도입에 나섰고 하이마트 등도 렌탈 시장을 노크하고 있다.

렌탈 시장은 침체된 유통업계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점과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업계의 진출 경쟁이 본격화 될 전망이다.  홈플러스는 업계 최초로 손쉽게 자동차를 빌려쓸 수 있는 ‘카 셰어링’ 서비스를 선보였다.

이 서비스는 기존의 렌트카 보다도 진화된 개념으로, 최소 한 시간부터 30분 단위로 차를 빌릴 수 있다. 또 홈플러스 영업망을 활용해 각 지역 거점에서 간편하고 저렴하게 차량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차량 공유 제도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용비용도 저렴하다. 준중형차를 주중에 이용하는 경우 1시간당 4980원, 하루 4만9800원으로 기존 렌터카에 비해 20~54% 싼 것이 장점이다.

GS샵은 이마트에 이어 렌탈전문관 ‘GS렌탈샵’을 열었다. GS렌탈샵은 웅진코웨이, 바디프랜드, 동양매직 등 주요 브랜드의 정수기, 이온수기, 안마의자, 컴퓨터, TV, 냉장고 등 80여 가지를 한 곳에서 비교해 보고 고를 수 있는 원스톱서비스라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렌탈상품은 약정기간 동안 일정금액의 렌탈료를 내면 최신 사양의 새 제품을 애프터서비스 등 지속적인 사후관리를 받으며 사용할 수 있다. 약정기간 후에는 고객에게 소유권이 이전된다.

이 같은 이점 등으로 고객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유통업계의 진출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형유통업체들이 ‘렌탈 시장’로 눈을 돌리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고가 제품 구매를 망설이는 소비자들이 늘자, 초기 비용을 줄여 소비자를 붙잡겠다는 전략이다.

지속적인 불경기, 고공 행진하는 유가 등으로 인해 가계 운영이 힘들어 지고 있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한정된 주머니경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렌탈을 찾고 있기도 하다.

소비자와 유통업체의 입장이 맞물리면서 대한민국 렌탈 시장이 호황을 맞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업계에서는 앞으로는 정수기, 비데 정도의 렌탈 서비스가 아니라 기발한 상품과 서비스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생동안 혹은 일 년 동안 몇 번 이용하지 않을 상품이나 서비스는 모두 렌탈 가능 품목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최근 현대백화점에서는 졸업 앨범 사진을 찍는 여대생들에게 유명 브랜드 정장을 대여하는 서비스를 실시해 좋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국내 여성 브랜드 40여개, 정장 200벌을 준비해 졸업 앨범 사진 촬영에만 사용하고 반납하도록 한 것으로 예비고객을 미리 확보한다는 차원에서도 주목 받았다.

소비 위축, 하반기까지 이어질 듯
유통업계가 가격 파괴는 물론이고 중고 판매, 렌탈 서비스 확대에 나서는 이유는 불황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올해 하반기까지는 민간 소비 위축이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국내외 주요 기관들의 예상이다.

한국은행은 민간소비가 올해 하반기까지도 생각보다 시원치 않을 것으로 점쳤다. 임금상승과 고용사정 개선 등으로 가계의 실질구매력은 증대되겠지만 높은 가계부채에 따른 원리금 상환부담과 주거비용 부담 등 국내적 요인과 유가상승으로 인한 교역조건 악화 등이 소비회복을 짓누를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한은이 전망한 상반기 민간소비 증가율은 1.8%로 지난해 하반기(1.6%)와 비슷한 수준이다. 글로벌 투자은행들도 최근 유럽 재정위기와 주가 하락, 부동산 시장 약세 등으로 소비심리가 악화돼 향후 민간소비가 둔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모건 스탠리는 “주가 하락과 부동산 시장 약세 등에 따른 부의 효과 감소로 고소득층의 가계지출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면서 “올 상반기 주가 하락으로 고소득층의 소비심리가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고소득층의 가계지출 둔화 및 소비자의 신중한 소비행태 등을 감안할 때 향후 1∼2개 분기 동안 가계지출 증가율이 둔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도 “지난해 3분기 이후 가계부채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다”면서 “가계 신용 증가세 둔화가 단기적으로 민간소비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대경제연구소의 진단도 비슷하다. 현대경제연구소는 이자상환비율 증가 등으로 가계 소비 여력이 억제될 것으로 봤다. 연구소 관계자는 “가계의 이자상환비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해 2011년 4분기 현재 2.9%로 2003년 이후 최고를 기록하는 등 가계의 소비 여력이 억제되고 있다”며 “전·월세가격이 높은 수준을 지속하고 있는 것도 가계의 소비여력을 억제해 민간소비증가율을 낮추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내외 경제연구소들은 한 목소리로 국내 소비 부진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물가는 높은데 소득 개선은 더디고, 가계 빚은 눈덩이처럼 불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소비 회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황경제에서 쉽사리 벗어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업계 한 관계자는 “불황기에는 소비자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실용성 강한 차선 상품을 고를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 제1의 마케팅 방법”이라고 말했다. 가격을 낮추고, 중고 상품을 제안하고, 빌려 주겠다고 나서는 것 등은 고객들에게 두 번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마케팅의 일환인 셈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유통업체들의 이른바 불황 마케팅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올해 유통업계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될 것이란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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