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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블러’ 경계가 사라진다경계 밖에서 건너 온 경쟁자들
  • 김정우 기자
  • 승인 2021.04.0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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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Blur)는 사전적으로 흐릿해진다는 의미이다. 이를 차용한 빅블러는 사물인터넷(IoT), 핀테크, 인공지능(AI), 드론 등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하면서 업종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온라인 마켓이 콘텐츠 서비스나 결제 서비스를 병행하고, 금융회사 대신 핀테크 업체 서비스를 이용해 금융업무를 보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빅블러 시대에 시장에서 잊혀지는, 즉 소비자로부터의 블러 처리에 대한 우려에 대응해 유통이나 금융 등 소비자 접점 비즈니스를 하는 업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쿠팡은 최근 미국 뉴욕증시 상장 직후 한 때 시총 100조원을 넘어섰다. 수년 동안 적자를 이어온 쿠팡에게 매겨진 이 같은 몸값은 대한민국 산업계에 충격을 줬다. 전세계 메모리반도체 1위 기업인 삼성전자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가치로 시장에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쿠팡의 기업가치가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다양한 이유로 설명된다. 그 중 하나가 온라인 마켓을 뛰어넘는 ‘쿠팡의 업(業)의 확장’에 있다. OTT(Over-The-Top)서비스인 ‘쿠팡 플레이스’ 출시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말 출시한 쿠팡플레이는 영상 콘텐츠를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다. 쿠팡의 와우멤버십 서비스에 가입한 회원은 추가 비용 없이 월 2900원 멤버십 비용만으로 이용할 수 있다.

온라인 유통 기업 쿠팡이 뜬금없이 OTT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것으로 비쳐졌다. 국내 OTT시장은 이미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서비스는 물론이고 웨이브나 왓차와 같은 로컬 동영상 스트리링 서비스 업체가 각축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들과 직접 경쟁하는 것이 쿠팡플레이 출시의 당장의 의도는 아니다.

쿠팡플레이 출시와 관련해 김성한 총괄 디렉터는 “와우 회원들은 쿠팡플레이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언제 어디서나 무제한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며 재미있는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와우 회원은 쿠팡 이용자 중 월정액을 내는 유료회원이다. 결국 쿠팡플레이는 충성도 높은 고객들에게 쿠팡 플랫폼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들을 붙잡고 확장하기 위한 노력이다. 빅블러 시대에 소비자에게 잊혀지는 ‘블러’처리를 당하지 않기 위해 사업영역의 경계를 허무는 ‘블러화’로 읽히는 이유다. 이를 두고 업계 한 전문가는 “오픈커머스 사업자가 음식배달 시장과 OTT 시장에 연이어 진출하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 사업자가 라이브커머스 시장에 진출하고, 유통업자가 물류업에 진출하고, 포털 사업자가 다양한 사업을 확장하는 모습이 디지털 경제의 현주소”라고 말했다.

무너진 경계, 업(業)확장 ‘가속화’

‘빅블러’ 현상은 비즈니스 영역에서 전통적인 주요 경계가 사라지는 시대적 흐름이다. 경제·산업 영역에서 기존의 경계가 무너지는 융·복합 현상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산업 경계가 사라지는 세상의 한 단면을 떠올려 보자.

처음 세상에 ‘핸드폰’이 등장했을 때, 핸드폰은 이름 그대로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전화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전화 통화와 간단한 문자 정도만 가능했던 핸드폰은 이제 나만의 작은 영화관이 되기도 하고 모든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카메라이자 앨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 얼굴을 보며 수다를 떨게 만들어주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화기’를 넘어 자꾸 새로운 무언가로 진화하는 핸드폰처럼 우리 사회에는 ‘빅블러’로 인한 영역 붕괴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스타트업 투자에 앞장서고 있는 IBK기업은행의 설명에 따르면 미래학자 스탠 데이비스는 1999년의 저서 <블러: 연결 경제에서의 변화 속도>에서 혁신적인 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경계가 허물어지는’ 의미로 ‘블러’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책에 등장한 ‘블러’라는 단어는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 시대의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설명하기 위한 경제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급변하는 사회 환경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허문 산업 및 업종 간의 영역 붕괴, 모든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빅블러’ 현상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담은 진작 무너졌고, 판매와 유통을 비롯한 업종 간의 결합 또는 산업과 산업의 확장이 순식간에 이뤄지며 가속화되고 있다. 체인파트너스 리서치센터가 발표한 ‘블록체인 및 디지털 자산 시장 트렌드’ 보고서에서도 빅블러를 ‘7대 트렌드’로 거론하며 많은 이들이 이 현상에 주목하고 있음을 밝혔다.

초연결 시대, 우리의 생활에 ‘빅블러’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온라인 배달앱으로 오프라인 매장의 음식을 집에서 먹는 것, 숙박 예약 앱으로 여행을 계획하는 도시의 숙소를 잡는 것도 모두 ‘빅블러’로 인한 변화로 볼 수 있다. 소비자들은 이미 자신이 알게 모르게 빅블러가 만들어놓은 초연결 시대에 들어섰고, 빅블러 현상으로 수많은 벽이 허물어진 세상에서 분명 과거와 다른 일상을 누리고 있다.

우리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은 빅블러 현상의 선구적인 사례는 ‘현금 보유액이 미국 중소은행과 맞먹는 스타벅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미국 디지털 시장조사 업체 이마케터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스타벅스의 모바일 결제 시스템 ‘사이렌 오더’ 이용자 수는 미국에서만 2340만명을 돌파했다. 이 수천만 명의 이용자들이 사이렌 오더에 충전한 금액은 약 20억 달러(한화 약2조4000억원)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스타벅스는 이 예치금으로 아르헨티나 은행 ‘방코 갈리시아’와 파트너 계약을 맺었고, 실제 오프라인 은행지점을 오픈하며 글로벌 핀테크 기업으로의 성장을 과시하고 있다.

다국적 커피전문점으로 78개국에 매점을 내고 있는 스타벅스가 애초 모바일 결제에 공을 들인 배경은 ‘고객의 경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서였다. 고객들이 계좌 이체시 발생하는 높은 수수료로 인해서 은행을 이탈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지점을 파악하고 이를 보완해 주기 위한 시도로 선불충전식 카드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2011년부터 도입된 선불충전식 스타벅스 카드는 고객들에게 규제 받지 않는 은행이 되면서 충성심을 부여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바일 카드로 진화했고, 스타벅스가 모바일 결제액 1위 기업이라는 테크핀 기업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배경이다.

온라인으로 도서를 팔던 아마존의 극적인 변신도 스타벅스와 같이 빅블러 시대의 대표사례로 회자된다. 현재 아마존은 전자상거래는 물론이고, 미디어 유통기업을 넘어서 세계 1위의 클라우드 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 사실상 금융사로의 확장도 이뤄지고 있다.

아마존은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아마존이 지향하는 것은 고객경험이다. 수단으로 전자상거래 플랫폼에 금융서비스를 접목시켰다. 지급결제, 은행계좌, 대출 보험 등 경계를 넘어서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축적된 1억4000만명의 고객은 아마존이 언제든지 금융사로 변신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마트·네이버, 경쟁·공존의 ‘블러’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 시대는 하나의 업력(業力)이 블러 현상이라는 흐름을 타고 극단적으로 다양화되는 시대인 셈이다. 조용호 비전아레나 대표 컨설컨트는 “과거를 돌이켜 보면 사회적으로 큰 혁신의 물결이 넘실대던 시기마다 대부분 다양성이라는 에너지가 충만했다”면서 “중세와 근대를 나눈 르네상스, 근대화 현대를 나눈 산업혁명 모두가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고 섞이면서 사회를 바꾸는 에너지를 분출한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서로 섞이고 융화되기 위해서는 경계를 지우고 낮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량공급 시대의 기존방식은 제품을 시장에 들이미는 형태였다면 “빅블러 시대에는 소비자가 제품을 끌어당기는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나아가 기업과 소비자가 만나 서로에게 피드백을 주는 관계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IT회사으로 꼽히는 네이버 역시 빅블러 현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다. 국내 최대 포털 기업인만큼 간편 결제 등을 통해 금융 부문에 무혈입성한 것은 물론, ‘종합 쇼핑 플랫폼’으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모바일 앱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와이즈리테일이 집계한 것을 보면 지난해 상반기 네이버 결제 금액은 12조5000억원을 돌파했다.

네이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신세계그룹과 2500억원 규모의 지분 맞교환도 이뤘다. 이마트는 1500억원, 신세계백화점은 1000억원 규모로 네이버와의 상호 지분 교환을 했다. 네이버는 이마트 지분 2.96%, 신세계인터내셔날 지분 6.85%를 각각 보유하게 됐고, 이마트와 신세계는 네이버 지분을 총 0.4% 쥐게 됐다. 이를 통해서 네이버와 신세계그룹은 이커머스 사업부터 물류와 멤버십, 상생 등 전방위에 걸쳐 협력하기로 했다. 신세계그룹이 가진 이마트 장보기, 신세계백화점 패션 명품 등의 강점이 네이버의 막강한 플랫폼과 결합해 고객들에게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이를테면 신세계그룹의 전국적인 물류망 7300여 곳에 네이버의 물류 파트너사들까지 협력하면 지금의 새벽 배송은 물론, 2~3시간 내에 도착하는 즉시 배송까지 추진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회사는 “이번 사업 협약을 통해 온·오프라인 유통 최강자로 재탄생, 유통 시장을 압도하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앞서 네이버는 지난해 CJ그룹과 6000억원 규모의 지분교환을 통해 CJ대한통운과 협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네이버-신세계-CJ대한통운’으로 이어지는 물류 협력 가능성도 제기된다. 3년 이내에 CJ그룹과 메가물류센터 설립, 이마트와 협업을 통해 쿠팡의 신선식품, 생필품 배송과 유사한 수준의 배송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또 해외에서는 일본 A홀딩스 출범으로 일본 쇼핑시장 확대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핀테크, 전통 금융업 침투 가속

빅블러 현상은 인터넷 플랫폼의 금융 영역 침투에서도 극적으로 나타난다. 인터넷 업체들의 간편결제 서비스는 송금과 결제를 넘어 금융 서비스로 확장 중인데, 특히 핀테크 기업들의 은행, 증권, 카드사 등 기존 금융권에 대한 도전이 거세다.

핀테크 업체들의 금융 산업 진출을 위한 금융 당국의 규제 완화 행보가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라는 진단도 나왔다. 지난해 말부터 전면적으로 시행 중인 오픈뱅킹은 금융결제 시스템 혁신의 기반 인프라가 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이민아 대신증권 연구원은 “핀테크와 같은 새로운 사업자들이 금융 산업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고 데이터 개방으로 금융 마이데이터 산업이 본격화될 수 있다”면서 “금융 상품 판매채널이 핀테크 서비스로 옮겨올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대형화된 일부 핀테크가 종합지급결제업으로 진화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금융 서비스 확대를 위해 카카오가 바로투자증권을 인수해 증권업에 진출한 것이나 삼성화재와 제휴해 디지털 손해보험사 설립도 검토 중인 것은 이 같은 흐름 속에 나타나는 일들이다. 간편송금 핀테크 기업이었던 토스는 모바일 증권사 토스증권을 지난 2월 출범시켰고, 같은 달 금융위원회에 인터넷전문은행 본인가를 신청했다. 토스는 오는 7월 ‘토스뱅크(가칭)’ 출범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완료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경력 개발자 채용에도 나서는 등 설립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민아 연구원은 “오픈뱅킹으로 시작된 ‘금융결제 인프라 혁신 방안’의 완성은 금융 마이데이터 사업 활성화와 종합지급결제업자의 도입”이라며 “대형 핀테크 업체는 종합지급결제업자로 진화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은행의 판매 채널과 신용카드업의 일부를 대체할 전망”이라고 진단했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도 “시중은행은 예금·대출, 카드사는 신용판매라는 명확한 구획 속에서 손쉽게 고객들을 유치해왔다. 이 경계선은 다른 어떤 상대도 침해할 수 없는 견고한 영업기반이기도 했다”면서 “빅블러는 이런 산업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이다. 금융이 금융사만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도입 전망인 종합지급결제업 라이선스를 취득하면 은행이 아닌 IT기업들도 계좌를 발급할 수 있게 된다. 이 계좌에 기반 해 급여 이체, 카드대금·보험료·공과금 납부 등 은행에 준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마이데이터사업에 진출한 핀테크 기업은 자산관리 서비스를 운영해 금융사보다 더 정밀한 서비스를 할 수 있다. 카드업계 역시 토스뱅크가 신용진출업 진출을 타진하고 있어 강력한 도전자를 상대할 전망이다.

소비자들이 네이버나 카카오페이를 주거래계좌로 설정하고 이들이 제공하는 강력한 플랫폼 서비스에 안착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금융사가 ‘블러 처리’ 또는 ‘아웃포커싱’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금융업계 수장들이 위기감을 드러내는 게 자연스럽다. 손태승 우리금융그룹 회장은 “기존의 금융그룹들은 누가 적인지도 모를 빅블러 시대 속에서 무한경쟁하며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의 전환기에 놓여있다”고 표현했다.

융·복합 혁신기술로 무장한 테크기업을 새로운 경쟁상대로 맞은 금융사들의 대응이 바빠질 수밖에 없다. 금융뿐 아니라 비금융까지 아우른 융·복합 플랫폼을 제공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7월 유망 스타트업 5곳(핀다, 마인즈랩, 옴니어스, 데이터마케팅코리아, 자란다)에 직원들을 파견해 일하는 방식과 기업문화를 배워오도록 했다.

신한은행은 올해 중순 자사 뱅킹앱에 배달의민족과 같은 음식 주문중개 플랫폼을 탑재할 예정이다. 이는 은행권의 첫 플랫폼 비즈니스 진출이다. 또 금융-게임을 융합한 혁신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넥슨과 제휴했다.

이 같은 움직임과 관련, 조용호 비전아레나 대표 컨설컨트는 “경계 밖에서 넘어온 경쟁자들은 소비자들에게 다른 형태로 가치를 전달하기 때문에 기업들은 이들을 상대하기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면서 “심한 경우 이들은 기존 산업 전반을 와해시키는 혁신을 불러오기도 한다”고 진단했다.

김정우 기자  nexteconomy@next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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