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상대적 강자인 갑(甲)이 상대적 약자인 을(乙)에 대해 부리는 횡포와 비인격적 행동을 통상 ‘갑질’이라 부른다.
우리말에서 ‘질’이라는 접미사(接尾辭)는 ①일부 명사 뒤에 붙여서 동작이나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예를 들면 걸레질, 삽질, 가위질, 쟁기질, 대패질, 손질, 칼질 등이 이런 것이다. ②직업이나 동작 및 행동을 부정적이고 천하게 일컫는 말이다. 예를 들면 목수질, 선생질, 훈장질, 삿대질, 발길질, 쌈질, 욕질 등이 이런 것들이다. ③일부 명사 뒤에 붙여서 옳지 않은 일을 뜻하는 말이다. 계집질, 서방질, 도둑질, 돈질, 도박질 등이 이런 것들이다. ‘갑질’은 ③에 해당하는 말이다. ‘갑질’이라는 말이 그다지 품위 있는 말은 아니나 현재 우리사회에서 통용되는 말이므로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면 갑질은 어떤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일까? 유태인 사상가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상호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로 나누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인간화된 관계이고 대화가 가능한 관계이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관계는 비인간화된 관계이고 대화가 단절된 관계, 곧 독백과 독선과 아집만이 가능한 관계이다. <나-너>의 관계가 상대방을 나와 같은 감정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인정하는 관계라면, <나-그것>의 관계는 상대방을 감정과 목표가 없는 무생물로 취급하는 관계이다. 칸트(I. Kant)의 개념을 빌리면 <나-너>의 관계는 인간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관계이고 <나-그것>의 관계는 상대를 내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으로 생각하는 관계이다.
갑질은 바로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나-그것>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모 항공사 오너 가족의 갑질, 재벌 3세들의 운전기사에 대한 갑질, 아파트 입주민의 경비원들에 대한 갑질, 프랜차이즈 본사의 가맹점들에 대한 갑질 등으로 인해 을에 대한 갑의 횡포가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영원한 갑은 없다
우리사회에서는 관행적으로 하도급이나 대리점 계약, 프랜차이즈 가맹계약 등을 할 때 계약서에서 원청업자를 갑이라 칭하고 하청업자를 을이라 칭한다. 또 기업의 오너 일가와 종업원 사이에서 오너 일가는 갑이 되고 종업원은 을이 된다. 그런데 통상 갑이 강자이고 을이 약자이다.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는 갑이 을에게 부당한 횡포를 자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을은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갑의 횡포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도가 지나쳐 최근에 큰 사회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갑질이 나타나는 것은 강자인 갑이 을과의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을도 감정과 목표를 지닌 인간으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 또는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만 취급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이고 몰염치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자행하는 것이다. 갑질하는 갑들은 돈과 힘은 갑일지 모르나 그 인격은 을도 아니고 병(丙) 수준 이하이다.
그런데 갑질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갑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원청업체의 간부사원, 인허가를 담당하는 공무원 등이 갑질을 많이 하는데, 이들은 사실상 뒤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갑의 고용인에 불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실질적인 갑과의 관계에서 을이며, 또 퇴직과 동시에 을의 위치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이 마치 실질적인 갑인 것처럼, 그리고 영원한 갑인 것처럼 오만방자한 짓을 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갑에서 을로 바뀐 것이 아니라 병(丙)도 아니고 정(丁)도 아니고, 천간(天干)의 맨 마지막인 계(癸)로 떨어져버렸다.
모 항공사의 오너 일가는 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을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원한 갑이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도가 넘는 갑질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 법의 심판대상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그들은 앞으로 목에 힘주고 갑질하는 행위를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추락한 이미지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상당기간, 아니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비록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사회적으로는 죽었다.
사람들은 돈만 많다고 존경해주지 않는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건 갑질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닐 것이며 드러내놓고 고상한 말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선적 행동으로 치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가?
이런 결과는, 말이 없는 자연생태계를 <나-그것>으로 생각하여 파괴하면 그 파괴된 생태계가 보복을 하는 원리와 같다. 코로나-19 사태가 바로 그런 것이다. 항공사 오너 가족은 승무원들도 감정과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자신들의 돈벌이와 권위를 세우기 위한 <그것>으로만 생각한 결과 그들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인간적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자신이 그들을 먹여 살리니 그들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좋다’는 오만방자한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런 행위는 사회적 격리를 유발한다.
기업의 창업자와 그것을 물려받은 후손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사고방식은 종업원들을 <나-그것>의 관계로 보는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의 후폭풍은 만만치가 않다. 갑질하는 재벌 3세들이나 모 항공사의 땅콩공주도 그 후폭풍의 영향을 평생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