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나부끼는 형언할 수 없는 억새의 찬란한 몸짓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정선의 민둥산이다. 정선에 가려면 자동차도 힘겨워 ‘부릉부릉’ 용트림을 하듯 산 능선을 넘어야 한다. 무르익어가는 가을과 벗할 수 있는 정선으로 떠난다.

대한민국 억새 1번지, 민둥산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온 지 1시간가량이 지났다. 그제야 비로소 민둥산 들머리에 닿을 수 있었다. 그나마 길이 좋은 요즘이니 1시간이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 시절이라면 ‘세월아 네월아’ 걷고 또 걸어야 도착했을 법하다. 도로가 지금처럼 구석구석 놓이지 않았을 때에 정선은 강원도의 대표적인 오지였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자동차 핸들 꺾는 재미가 있다. 첩첩산중 정선 여행의 묘미다.

정선의 대표적인 민요인 정선아리랑이 불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던 때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정치세력이 조선 개국세력에 밀려 정선으로 숨어든 것이다. 그들은 지난날의 권력을 회상하며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한 심정을 한시로 읊었는데 그것이 정선아리랑의 노랫말이 되었다 한다. 노랫말에 지은이의 심정이 묻어 있다.

어느덧 민둥산(1,117m) 들머리인 증산초등학교 앞에 도착한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민둥산의 옛 이름은 ‘한치뒷산’이다. 정선아리랑에도 ‘한치뒷산’이 등장한다. 정선군 남면에 한치마을이 있는데 마을 뒷산이 민둥산이었다. 그래서 한치뒷산이라 불렀다.

민둥산 등산을 위해서는 왕복 9km를 4시간 정도 쉼 없이 걸어야 한다. 짧은 코스는 아니지만 등산로가 잘 놓여 있어 무난하다. 무엇보다 억새를 벗 삼아 걷기 때문에 고되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2019년 민둥산억새꽃축제는 11월 10일까지 민둥산 일원에서 열린다.

민둥산 통제소를 지나 갈림길을 앞에 등산객을 맞이하듯 쉼터가 기다리고 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 벤치에 앉는다. 산뜻한 가을 공기 맛이 예사롭지 않다. 자세를 가다듬고 깊이 숨을 들이쉰다. 맑은 공기 속에 생명의 기운이 담긴 것일까, 온몸이 후끈하다. 도시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깨끗한 공기.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몸이 먼저 느끼는 것을 보면 몸은 자연을 향해있는 듯하다.

품이 넉넉한 민둥산에 안기다

산길을 걷는 동안 거미줄처럼 엉켰던 몸과 마음이 질서정연하게 교통정리를 시작한다. 왜 현대인들이 갈급한 마음으로 산을 찾는지 이유를 알법하다. 생명 안에 답이 있음을 알기에 생명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닐까. 정상부까지 등산로가 잘 놓여 있어 평소에 잊고 살았던 삶의 파편들을 한 조각씩 모으고 정리하기 그만이다. 걷기 좋은 만큼 가족단위 탐방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초등학생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산길을 걸으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모습이 정겹다. 40분 정도 오르자 바람결이 강하다. 주위는 막힘이 없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울창한 숲길이 끝난 것이다. 덕분에 파란 하늘을 마주한다. 곧이어 정상부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거친 숨을 토하며 자박자박 걸어오는 등산객들을 어머니처럼 넉넉한 품으로 맞아준다. 그리고 그들을 품는다.

민둥산은 대한민국 억새 1번지임에 분명하다. 산 전체가 온통 억새로 뒤덮여 억새의 향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단풍이 뇌쇄적인 색채의 아름다움이라면 억새는 바람과 함께 상처 난 곳을 매만져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아늑하다. 화려하게 치장한 미인은 아니지만 청초한 민낯처럼 순수하다. 산 전체가 은빛 억새로 화사하게 변할 때 바람과 함께 춤이라도 춘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런들 어떠랴. 민둥산 억새가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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