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에는 ‘완장병’이라는 말이 있다. 완장(腕章)이란 전통사회에서 특별한 신분이나 지위 또는 임무 따위를 나타내기 위해 헝겊이나 비닐 등으로 둥그렇게 만들어 팔에 두르는 표장(標章)이다.

그런데 이 완장이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순박하던 사람에게 어떤 완장과 함께 감투가 주어지면 돌연 악당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 한국전쟁 중 이른바 인공(人共) 점령지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지극히 평범한 이웃 아저씨에게 일제(日帝)나 인공이 어떤 직책과 함께 완장을 채워주면, 그들의 앞잡이가 돼 동족을 괴롭히고 온갖 잔인무도한 악행은 물론 살인까지 저지르는 악당으로 변신한 것이다. 누군가가 항의하면 이들은 왼쪽 어깨에 찬 완장을 툭툭 치면서 위세를 떨었다.

1990년대 초반 ‘똠방각하’라는 TV미니시리즈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똠방’이란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나 되는 것처럼 허풍이 많고 과장하기를 좋아하며, 무슨 일이든 실제보다 부풀려서 말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의 특징은 온갖 일에 끼어드는 ‘마당발’인데, 아무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제 분수를 모르고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한마디로 똠방은 푼수이거나 반팽이거나 과대망상에 빠진 건달인데, 자신은 매우 똑똑한 걸로 착각하고 있는 위인이다.

그런데 이 똠방에게 각하(閣下)라는 경칭이 붙은 드라마가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이다. 각하라는 말은 특별한 고급관료에 대한 경칭이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 대통령을 호칭할 때 각하(閣下)라는 말을 써 이 말이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조선시대에 각하는 정승에게 쓰는 호칭이었다. 정승이 집무하던 곳을 각(閣)이라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감(大監)이란 호칭은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벼슬아치를 일컫는 말이었고, 정삼품(正三品)과 종이품(從二品)은 영감(令監)이라는 호칭을 썼다.

‘똠방’에게 완장이 주어지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각하’로 변신한다. 일제 강점기의 ‘순사완장’, 인공 때의 ‘붉은완장’이 대표적인 완장이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주번이나 당번을 할 때도 완장을 찼다. 그러면 모두 두려워했다. 다른 학생들을 제압하고 딱지 등을 빼앗고, ‘하라, 하지 마라’ 명령할 수 있는 공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똠방은 완장이 주어지자마자 그 동안 무시당했던 분풀이를 하기 시작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휘둘러댄다. 이 완장은 ‘똠방’ 같은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그 위력이 극대화된다. 사리분별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면 별 효과가 없다.

이를 잘 아는 일제(日帝)나 인공(人共)은 동네에서 그동안 설움 받던 빈자(貧者)들이나 따돌림 당하던 사람, 그리고 머슴들에게 ‘인민위원장’이라는 감투와 함께 완장을 채워줬다. 그 순간부터 완장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렇게 순진했던 행랑아범이 인공의 앞잡이가 돼 주인을 잡아가두고 족치는 등 온갖 악행과 잔인무도한 짓을 감행했다.

맹목적 복종이 악인을 만든다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유태인 홀로코스트의 핵심 책임자 중 한 사람인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에게서 일제 강점기의 일경(日警) 앞잡이나 인공 때 완장을 찼던 무식한 머슴들처럼, 한 평범한 인간상을 목도한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한나 아렌트를 소름끼치게 했다.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이웃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를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 이름 했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도 어떤 조직 속에 들어가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다보면 악마와 같은 행위를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 원인이 ‘생각 없는 행동’에 있다고 봤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지시에 따르다 보면 인류 보편적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행위도 서슴없이 저지른다는 것이다.

악행은 나치나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행위에서부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우리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악행은 후자의 악행이다. 네트워크마케팅이 국민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일부 회사와 네트워커들의 악행 때문이었다.

즉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고,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이 더 큰 비난을 불러일으킨 요인이 되었다. 그러면 그런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그런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평범한 국민이요, 맘씨 좋은 이웃 아저씨이며, 집에서는 듬직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환경적 요인으로 그런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이 무엇일까? 바로 회사의 문화이다. 회사와 리더들의 문화가 사익극 대화에 압도돼 파트너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때, 그 권위에 눌려 파트너들이 ‘맹목적인 복종’을 하게 되면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악행이 저질러지는 것이다.

회사와 네트워커들이 이런 사실을 유념하지 않으면 공멸한다.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가 망한 것처럼. 제 분수를 모르고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한마디로 똠방은 푼수이거나 반팽이거나 과대망상에 빠진 건달인데, 자신은 매우 똑똑한 걸로 착각하고 있는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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