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

 이별의 상처는 물리적이다. 어제까지 내 심장의 주인이던 사람이 심장을 떼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합의하에 이별하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일방적인 통보라면 어떨까? 사랑은 동시에 시작할 수 있지만, 이별은 그럴 수 없다. 먼저 사랑을 놓는 쪽이 생겨나고, 상대방은 그것을 뒤늦게 따라야 한다. 상대방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쪽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배신감과 상실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에서>

추운날씨만큼 공허한 마음이 오가는 출근길에 다투는 연인을 보았다. 기분이 썩 좋았다면 표정과 자세 등 내 식스센스를 총 동원해 누구의 잘못인지 점치는 재미를 붙여보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저들은 왜 싸울까? 무엇이 저들의 사랑을 변하게 했을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랑을 한다. 연인, 가족, 친구, 선후배, 직장 등 다양한 사랑을 나눈다. 나 역시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가끔 아니 요즘은 자주 나의 사랑이 의심스러워 질 때가 있다. 사랑하는 게 아닌 사랑받길 구걸하는 것 같은 자괴감과 죄책감이 든다. 무엇이 나를, 나의 사랑을 변하게 했을까?
나의 고민에 속상할 타인을 위해 혼자서 멍하게 지낸 일주일이 보내고 책을 꺼내 들었다. 우연히 역사 편의점에서 만난 구세주다.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는 고된 일도, 성숙하지 못한 엄마에게 받는 내 아이의 상처에 대한 미안함도, 만족스럽지 못한 만남들이 가슴 아픈 나에게 말했다.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말라고….’ 또 자발적으로 사랑할 나이부터 현재까지 많은 노력에도 상처받았을 텐데 그럼에도 계속 노력하고 있는 나의 고집에 씁쓸한 박수를 보냈다.
사랑한다고 들인 노력으로 키운 기대가 날 아프게 아는 꼴이라니 아이러니 하기는 하다.
단면적이지만 이 책에서 내가 느낀 해답에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적어 봤다. 생선살을 발라주는 아내의 마음은 사랑이었다. 매일 생선살을 발라주다 보니 자신에게는 머리만 남겨졌다. 인내했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 날 생선살을 발라주는 아내가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렇게 까지 하는데 나는 머리만 먹고 생선살은 당신이 다 먹는거야?!’ 남편은 말했다. ‘단 한 번도 생선살을 발라달라고 한적 없어.’
잔인하지만 그렇다. 그런 사랑을 달라고 한적 없다. 또한 내가 주는 사랑은 어쩌면 목적 있는(너도 같이 먹자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 등)사랑 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생선살을 발라주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 아니 생선을 다 태워 먹어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본인을 희생해서 사랑을 얻어서는 안 된다. 또한 남편은 적어도 매일 얻어먹은 생선살이 자기 필요에 의해 식탁에 오른게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자신이 나설 수도 있다. 생선살은 많고 머리는 맛이 없다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오는 힘듦을 유달리 더 힘들어 하고 있다며 내가 그런 그릇 밖에 안 되는 탓이지만 어쩌면 내탓으로 돌리기에 나는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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