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슬론 경영대학원 행동경제학 교수인 댄 애리얼리(Dan Ariely)의 저서 <상식밖의경제학>(Predictably Irrational)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수십 년 전 박물학자 콘라드 로렌츠(Konrad Z. Lorenz)는 갓 알을 깨고 나온 새끼거위가 처음 본 사물 가운데 움직이는 것에 애착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보통의 경우는 자신의 어미가 그 대상이다. 로렌츠는 세끼거위가 알을 깨고 나와 처음 본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을 관찰한 후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이를 통해 로렌츠는 주변에서 접한 것을 바탕으로 최초의 결정을 내릴 뿐만 아니라 한번 내린 결정은 끝까지 고수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각인(imprinting)’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 뇌의 작용도 거위 뇌의 작용과 다를 바가 없을까? 첫 인상도 각인되는가? 그렇다면 각인은 우리 삶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까? 이를테면 새로운 상품을 대했을 때는 어떨까? 처음 제시된 제품의 가격을 그대로 받아들일까? 그 가격이 이후 그 상품을 구입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까? 그렇다. 거위에게 통용되는 이 원리는 인간에게도 통용된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닻 내림(anchoring)이라 한다. 첫 인상이 각인되는 것은 새끼거위나 인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일은 정확히 어떤 작용을 거쳐 이뤄지는 것일까? 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행동경제학 교수들은 MBA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와인 및 다른 물품들에 대한 경매실험을 했다. 강의실에서 마케팅 수업을 듣는 학생은 모두 55명이었다. 이들 교수들은 우선 자신의 사회보장번호 끝 두 자리를 적으라고 한 다음 와인 및 경매물품들에 입찰하라고 했다. 이들 교수들이 이 실험에서 확인하려고한 것은 ‘임의적 일관성(arbitrary coherence)’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였다. 임의적 일관성이란 처음 매겨진 가격이 ‘임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뇌리에 자리를 잡으면 현재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가격도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사회보장번호를 한번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과연 그것이 닻 내림 기능을 할까? 실험 교수들은 이 점을 알고자 했다.
댄 애리얼리 교수가 학생들이 적어낸 입찰가를 분석한 결과 사회보장번호 끝 두 자리가 입찰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확인됐다. 사회보장번호 끝 두 자리가 매우 높은 학생들(80-99)은 아주 높은 가격을 매긴 반면 끝 두 자리가 매우 낮은 학생들(1-20)은 아주 낮은 가격을 매겼다. 예를 들어 끝 두 자리가 상위 20% 안에 드는 학생들은 무선 키보드(경매물품)에 평균 56달러를 매긴 반면 하위 20%에 드는 학생들은 평균 16달러를 매겼다. 결과적으로 사회보장번호 끝 두 자리가 상위 20% 안에 드는 학생들은 하위 20% 안에 드는 학생들보다 216%에서 346%까지 가격을 높게 매겼다.
이런 실험을 MIT 최고경영자 과정의 임원과 관리자를 대상으로도 진행했는데 결과는 동일했다. 매우 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MIT 경영대학원 학생들 그리고 유수한 기업의 최고경영자들과 임원들도 자신도 모르게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즈니스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마트나 백화점에서도 닻 내림 효과를 비즈니스 전략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새로운 제품이 출시됐을 때 정가를 100만원이라 매겨놓는다. 그러면 그 가치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없는 고객들은 100만원 가치가 있는 제품으로 인식해버린다. 다시 말하면 100만원에 닻 내림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100만원을 주고도 그것을 살 수 있는 고객들은 그것을 산다. 이런 여유 있는 사람들이 거의 다 샀다고 판단되면 가격을 20% 정도 할인하는 세일을 한다. 100만원에 닻 내림이 돼있는 상황에서 가격이 80만원으로 떨어지면 20만원을 아꼈다고 느껴 수요가 증가한다. 이런 닻 내림 효과를 이용해 고가의 정가표를 붙여놓고 아예 처음부터 할인해 파는 경우도 있다. 근사하게 보이는 옷에 300만원이라는 정가표를 붙여놓는다. 옷이 맘에 들어 사려던 사람이 가격을 보고 깜짝 놀라 포기하려는 순간 종업원이 잽싸게 다가와 ‘손님에게 환상적으로 어울리는 스타일’이라는 등의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다음 이번 특별행사 기간에만 50% 디스카운트된 가격 150만원에 한정 판매한다고 설명하면 그 옷이 엄청나게 싸게 느껴진다. 그 정가표 300만원을 보는 순간 고객의 뇌리에는 300만원이 닻 내림 돼있다. 다시 말하면 순간적으로 300만원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때 150만원에 산다는 것은 횡재라고 생각해서 지갑을 연다.
제품을 번들(bundle)로 파는 경우에도 닻 내림 효과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번들 하나를 사면 50만원, 2개를 사면 90만원, 3개를 사면 120만원, 4개를 140만원이라 하자. 그러면 번들 하나 50만원이 닻 내림 가격이 된다. 다시 말하면 고객들은 이 제품의 가치를 50만원이라고 순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번들 2개를 샀을 때는 하나에 45만원, 3개를 샀을 때는 40만원, 4개를 샀을 때는 35만원이 된다. 이 경우 고객들은 4개를 사는 것이 1개를 사는 것보다 훨씬 싸다는 인식을 갖는다.
이와 같이 정보부족으로 가치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연히 얻은 정보가 기준을 형성해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기준에 따라 의사결정을 한다. 인간의 판단체계가 이성적인 같지만 사실은 매우 순간적인 감정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닻 내림 효과라 한다. 한편 닻 내림 효과는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의사결정에 오류를 발생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고정관념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과 학습의 내용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방금 전에 얻어진 정보에 의해서 형성되기도 한다. 고정관념은 의사결정과 행동에 오류를 발생시키므로 고정관념을 깨는 게 중요한데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초는 경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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