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0년 쯤 전 금융규제 개혁을 추진하며 금융시스템을 시장 친화적이고 소비자 지향적으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경험했고 수년전 금융소비자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장을 맡아 소비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그 힘을 활용해 금융 산업을 발전시키는 방안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의과 대학에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듯 우리 금융 분야에도 많은 인재들이 몰린다. 하지만 우리 금융 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수한 공무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많은 취업 준비생들에게 신의 직장으로 불리며 뛰어난 인재를 끌어 들이는 금융계가 가끔 금융위기를 일으켜 나라경제를 어렵게 하고 오히려 외국의 금융서비스에 비해 뒤처진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금융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역할이 미흡해서가 아닐까?
과학적 이론에 의한 계획을 세워 운영한 공산주의 경제가 망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중앙 집권적 계획에 의한 산업 육성보다 수많은 소비자의 선택을 활용한 시장 경쟁이 경제 발전에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우리 금융시장은 어떤가? 얼마 전 상을 당해 돌아가신 분의 예금을 찾으려 했더니 까다로운 서류 때문에 상속인 중 외국 거주자가 있으면 작은 돈은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나을 듯하다. 물론 누군가의 피해를 막기 위한 절차임을 이해하지만 본인이 사망한 경우 미리 인출자를 지정할 수 있게 하거나 일정기간 보증을 조건으로 출금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또한 소액 송금이나 결제에도 복잡한 인증 절차를 요구해 성가시기 이를 데 없다.
보이스피싱이나 해킹 위험이 적은 경우라면 소비자들이 간편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일정 금액 이상 송금을 하려면 OTP카드를 사용해야 하는데 하나의 계좌를 공동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 OTP카드는 하나만 발급돼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PC에서 송금이나 결제를 하는 경우 몇 개의 보안프로그램을 깔아야 하고 가끔 충돌이 나서 다시 제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 불편을 알았는지 문재인 정부가 대선 공약으로 금융거래 등에서 액티브엑스나 공인인증서 사용의무를 없애겠다고 한 것은 참신했지만 그런 공약까지 나와야 하는 현실이 한심하다. 금융당국의 일방 통행식 규제가 없다면 그런 공약을 할 것도 없이 금융회사 간 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비자에게 편리한 시스템이 도입됐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선택을 활용해 금융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고 소비자 편익이 중시되는 시장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거의 매일 체험할 수 있는 송금과 결제와 관련된 불편에 대해서만 언급했지만 금융당국의 규제 때문인지 혹은 금융회사들의 나란히 줄서는 체질 때문인지 어느 금융회사든 유사한 상품들을 공급하고 따라서 소비자들은 누구와 거래하든 별 차이가 없다. 그저 좀 친절하고 가까운 곳에서 거래하면 되는 것이 현실이다. 다양한 금융상품이 경쟁하고 소비자들의 선택에 의해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상품을 공급하는 금융회사가 살아남는 시장 환경을 만들어 간다면 금융 산업의 경쟁력은 물론 소비자들의 권리도 강화되고 투자 역량도 높아질 것이다.
문제는 우리 금융 분야의 정책, 업계 담당자들은 함께 줄서며 이익을 누리는 시장 환경에 익숙해져 소비자의 선택을 활용하는데 서툴 뿐 아니라 무시하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조차도 소비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당국이나 업계에서 정한 방법으로 소비자들을 줄 세우는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소비자 권리 강화를 위해 추진 중인 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이 금융당국의 권한을 강화하는 또 다른 업계 줄 세우기 수단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업계에 대한 벌칙이나 규제를 강화하고 별도 금융소비자보호 기구를 설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소비자들이 스스로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부당한 이익 침해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기 쉽도록 하는 것이다.
금융소비자보호를 명목으로 별도 조직을 설립하거나 업계에 대한 규제를 늘리고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오히려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하고 자칫 감독당국의 이기주의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감독조직이나 권한이 부족해서 소비자보호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느 면에서 유통업계는 그 동안 금융시장에서 차별적으로 불이익을 받아 온 면도 있다. 필자가 십여년 전 방문판매법을 개정, 소비자피해보상보험을 도입하면서 금융기관의 보험 외에 업계가 직접 공제조합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나 수년 전 신용카드회사와의 제휴를 통해 업계의 카드 수수료를 낮추는 일을 추진했던 것도 경쟁을 기피하는 금융시장의 문제점을 업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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